범저
범저는 원래 위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이다.
그의 배경과 행보는 선배 장의와 비슷하다.
언변을 믿고 여러 제후들에게 유세하다 위왕을 섬기고자 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스스로 돈을 대지 못했다.
차선으로 먼저 위의 중대부 수가를 섬겼다.
수가는 외교 업무를 맡은 이로서, 우리는 화양의 싸움이 있기 전에 위염에게 유세한 것을 보았다. 글을 꽤 읽은 사람이고 말주변이 있었으니 외교를 맡았을 것이다.
과연 수가가 범저가 위로 올라갈 사다리가 되어줄 것인가?
수가가 위 소왕의 사자로 제나라로 갈 때 범저도 따라갔다.
몇 달을 머물렀지만 아직 돌아와서 보고하지 못했는데, 제 양왕이 범저의 변론이 좋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금 열 근과 쇠고기 안주에 술을 보내니 범저는 사양하고 감히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일이 수가로 인해 꼬이기 시작한다.
수가는 범저가 선물 받은 것을 알고 크게 노했다.
위나라로 돌아온 후 수가는 여전히 속으로 범저에게 화가 나서 이 일을 위나라 재상에게 고했다.
당시 위나라 재상은 여러 공자 중의 하나인 위제였다.
위제는 크게 노하여 사인을 시켜 범저를 매질해 갈비뼈와 이를 부러뜨렸다. 범저가 얻어맞다 꾀를 내어 죽은 척하자 사람들이 그의 축 처진 몸을 멍석에 둘둘 말아서 변소에 두었다.
그날 빈객들 중 술에 취한 이들이 돌아가며 범저에게 오줌을 눴다.
'첩자로 의심된 이'에게 치욕을 안겨서 뒷사람을 징계해 망령된 말을 하는 이가 없도록 한다는 이유였다.
죄도 없이 얻어맞고 끔찍한 치욕을 당한 범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된다. 이때까지 수가든 위제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범저란 인물을 파악할 안목이 없었을 것이다.
인기척이 없을 때 범저가 지키는 사람을 회유했다.
"공께서 저를 탈출시켜 주시면 저는 반드시 후하게 갚겠습니다."
범저가 불쌍했는지 아니면 정말 보상을 바라서였는지 지킴이는 범저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는 위제에게 가서 말했다.
"멍석 안에 있는 시체를 갖다 버리겠습니다."
위제는 술에 취해 별생각 없이 승낙했다.
이렇게 위나라를 탈출한 범저는 진의 사신을 만나 진으로 도망쳐서 진의 재상이 되었다. 진나라는 그를 장록이라 불렀기에 위나라는 이를 모르고 범저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줄 알았다.
진이 장차 동쪽으로 한과 위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위가 수가를 진에 사자로 보냈다.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수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범저가 이 소식을 듣고 신분을 속이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수가의 관사로 가서 만났다. 수가는 범저를 보자 놀라서 말했다.
"지금 범숙은 무슨 일을 하시오?"
'신은 남의 고용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수가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자리를 내주고 음식을 베풀며 말했다.
"범숙이 어찌하여 이리 빈한한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그러고는 솜옷 한 벌을 내주면서 물었다.
"진나라 재상 장군을 공도 아시오?
"저의 주인 영감이 잘 압니다.
저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으니 군을 장군에게 소개해줄까 합니다."
범저는 돌아와 큰 수레와 말 네 마리를 데리고 가서 수가를 위해 수레를 몰고 진의 재상 관부로 들어갔다.
부중의 사람들로서 범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모두 피했기에 수가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재상의 관사문에 이르자 범저가 수가에게 말했다.
"저를 기다리십시오. 제가 군을 위해 먼저 들어가 재상께 통보를 드리겠습니다."
수가가 문 아래에서 기다리는데 수레를 세운 지 상당히 오래되었기에 문지기에게 물었다.
"범숙은 어쩐 일로 나오지 않는 것이오?"
문지기가 대답했다.
"범숙이란 이는 없는데요."
수가가 의아해서 되물었다.
"방금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와서 들어간 사람 말이오."
문지기가 말했다.
"아, 그분은 저희 재상 장군입니다."
이제야 속은 것을 눈치챈 수가는 크게 놀라 웃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문지기를 시켜 죄를 빌었다.
이때 범저가 장막을 치고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나와 수가를 만났다.
수가는 머리를 조아리며 죽을죄를 빌며 말했다.
"저 가는 군께서 능히 스스로 청운의 위로 오르실 줄 몰랐나이다.
다시는 천하의 책을 읽지 않고 천하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삶겨 죽을죄를 지었지만 청컨대 스스로 호맥의 땅에 유폐될 것이니 군께서는 살려만 주십시오."
범저가 물었다.
"그대의 죄가 몇 가지인가?"
수가가 대답한다.
"머리털을 다 뽑아 죄를 빌어도 부족합니다."
범저가 말했다.
"그대의 죄는 셋이다.
예전에 초소왕 시절 신포서가 초를 위해 오군을 물리치자 초왕이 5,000호에 봉하려 했으나 신포서는 받지 않았다.
이는 조상의 묘가 초나라에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지 상을 바라서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 내 선조의 묘가 위나라에 있다.
그대는 전에 내가 제나라에 마음을 품었다 여기고 위제에게 나를 험담했다.
이것이 첫 번째 죄다.
위제가 나를 변소에 두고 욕을 보일 때 그대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다.
취해서 돌아가며 내게 오줌을 눌 때 그대는 어찌 잠자코 있었는가?
이것이 세 번째다.
허나 그대가 솜옷을 내주고 나를 측은해하며 옛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살려주는 것이다."
그러고는 꾸짖어 말했다.
"나를 위해 위나라 왕에게 고하시오.
당장 위제의 머리를 가지고 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장차 내가 대량을 도륙할 것이라고."
범저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사람인데 이렇게 그가 자기 성정을 그대로 드러낼 정도이니 그 개인적인 원한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된다.
수가는 돌아와 위제에게 이 말을 전했다.
위제는 두려워 조나라로 달아나 평원군 조승의 집에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