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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라 Jan 12. 2023

혼자일 때 찾아오는 질문

버킷리스트

비치 체어에 누워 펼친 책을 얼굴에 덮고 있다. 책 표지는 먼 바다 수평선에서 훔쳐온 듯 눈 부신 파랑과 청량한 민트색을 섞은 호라이즌 블루 색깔이다. 표지 한가운데 한 여인과 그보다 좀 어려보이는 남자가 커플처럼 담긴 사진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얀 르메일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 무려 38살 차이라고 한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그 정도까지 나이 차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든다. 오른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나만을 위한 음료가 놓여 있다. 얇은 유리 기둥이 받치고 있는, 아래가 둥근 칵테일 잔 안에는 얼음과 함께 수박과 멜론을 갈아 넣은 음료가 들어 있다. 앙증맞은 체리 꼭지와 파라솔 미니어처로 장식된 쪽을 피해 입술을 대고 한 모금 들이키며 서서히 주위를 둘러본다. 

눈앞에는 바다 아닌 작은 수영장이 있다. 책을 읽다 머리나 몸이 찌뿌둥해지면 헤엄을 칠 수 있다. 수영장 주위에 드문드문 놓인 비치 체어에 나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한 여성들이 앉거나 누워서 각자 책을 읽고 있다. 

여기는 <완독 독서 캠프>다. 이곳에 입장하려면 준비물이 있다. 시간이 나면 꼭 읽고 싶었지만, 바빠서 펼쳐 보지 못했던 책 한 권을 가져오면 된다. 내가 준비한 책은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결혼하고 나서야 이상형을 만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당신 영혼의 반쪽이라면?’ 그 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기력이 없어서 뭘 못 할 거 같은데요.’와 같은,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질문을 받았던 때는 초등학생, 유치원생 두 아이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기력이 없다는 말은 더함도 뺌도 없는 그 시절 내 상태였다. 아이에게는 눈을 뗄 수 없는 시기가 있고, 아이 보기를 누군가 교대해줘야 쉴 틈이 있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양육자가 한 사람 이상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고 영혼이고 간에, 아이 키우는 공간을 정비하고, 두 아이를 키우는 –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안아주고 진정시키고 달래고 가르치는 – 일만도 버거웠다. 나만 유독 힘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일단 엄마가 되고 나면 겪게 되는 과정이 그랬다. 

잠도 푹 자지 못하고, 느긋하게 먹고 씻는 자유도 누리지 못한 채 10년 훌쩍 지나는 건 예사다. 그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간절했다. 오직 꿈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었다. 그때 꿈꾸던 공간이 바로 <엄마들을 위한 휴식처 – 완독 독서 캠프>였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책만 읽을 수 있는 곳. 누군가 알아서 쉴 곳을 정돈해주고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타인을 돌보는 데 지친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맞춤 선물 같은 공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시절 가장 편안했던 곳은 할머니의 품 안이었다. 양반 다리 위에 나를 앉히고 책을 읽어주시던 할머니. 기억에 남는 건 어려운 성경 이야기를 어린이에게 풀어서 보여주는 그림책이었다. 꽃과 나무와 동물들이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할머니 품을 떠난 후에도 가장 좋은 기억은 옥상에서 해 질 무렵까지 책을 읽던 일이다. 우리 집 옥상에서 바라보는 내가 살던 동네는 산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둥지 같았다. 노을빛이 포근하게 사방을 감쌀 때면 페이지 속 글자들과 함께 나도 따스한 빛 속에 담기는 것 같았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왔다. 읽던 책을 덮고 저녁밥을 먹으러 굵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어머니가 상을 차리고 계셨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지친 엄마들을 위해 할머니 품 같은 휴식처를 만들고 싶다. 쳇바퀴 같은 돌봄 노동에서 벗어나 색다른 책 속 세계로 입장하는 장소를 마련하고 싶다. 어떤 중요한 일이든 간에 환기는 필요하다. 그곳에서 엄마들이 아이도 잊고, 자신도 잊은 채 등장인물과 동화되어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완독 독서캠프인 이유는 엄마들을 푹 쉬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못 나간다는 규칙을 걸어 놓고 오래 머물 수 있는 핑계를 만들어주고 싶다. 캠프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보통이라면 이곳에서는 읽을 책 분량을 정한다는 특색이 있다.

살림을 하다 보면 가족들의 욕구에 민감해진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고, 가족들이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러 집밖을 나서게 된다. 책 읽기는 가족들을 향해 안테나가 서 있는 엄마들이 자신의 욕구와 만날 수 있는 한 방편이 된다. 

책 읽는 시간을 가지며 어떤 장면에서는 설레기도 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화도 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히 느끼고 자신만의 욕구와 닿을 필요를 느꼈으면 한다.

미뤄왔던 책도 읽고,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잠도 푹 자고 충분히 휴식하고 나면 질문에 대답할 여유가 생길 것 같다. ‘이제 와서 이상형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대답은 이렇다. 난 이미 여러 명 만났어요. 얀 르메, 버트런드 러셀, 백석, 버지니아 울프, 패티 스미스. 그리고 수많은 새 연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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