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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라 Apr 11. 2023

할머니에게

유서쓰기


 날이 흐립니다. 유서 쓰기 퍽 좋은 날씨입니다. 요 며칠 길을 걸으면 꼭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나무 아래 서서 위를 올려다볼 때 시선과 하늘 사이 벚꽃잎이 가득 차서 하늘거렸습니다. 왜 찬란함 속에는 언제나 슬픔이 들어있는 것일까요. 눈에 물기가 생겨 시야가 번지면 꼭 그렇게 보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할머니, 제가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할머니가 먼저 가신 길을 따라간다 생각하면 한편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누구에게 말을 남길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남편과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 그다지 할 말이 없고, 아이들에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될 거 같지 않아 남길 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바빠 제 말을 들어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너무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할 말이 생기면 자문자답해 보곤 했어요. 펜으로 쓰면 종이가 항상 귀를 기울여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딱히 말할 상대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 있게 되나 봅니다.


 혼자라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은 늘 함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봐요. 저와 헤어진 이들에게는 제가 벌써 죽은 것과 같아서 이미 그 마음속에만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름답든 추하든 저와 함께한 순간을 누군가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따듯해지는 기분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마지막으로 머물 수 있는 장소는 다른 이의 마음속뿐이지 않을까요.


 가끔 할머니의 장례식이 떠오릅니다. 뒤쪽에 병풍을 두른 영정 사진 앞에서는 왠지 꿇어앉아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열다섯 살에는 다리가 펴지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버티고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슬픔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습니다. 지금은 좀 다를 수 있을까요. 다시 할머니를 보내드린다면 어떤 모습을 할 수 있을까요.


 살기 힘들 때는 제 장례식을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이들이 찾아와 저의 부재를 슬퍼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면 이상하게 가슴속이 훈훈해졌습니다. 그런 순간을 상상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 장례를 치러 줄 유일한 사람인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제 장례식에 올 만한 사람들을 꼽아보고 나면 저를 배웅해 줄 그들이 더 소중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왔을 때 첫 번째로 저를 환영해주셨던 분, 웃어주시고 품어주시고 때로는 혼을 내시고 가끔은 기특해하시며 저에게 세상을 알려주셨던 분이 할머니입니다. 당신은 제 삶의 주최자입니다. 태어나서 처음 책을 읽은 때도 할머니 품 안에서였지요. 책 읽는 시간을 좋아하고 자꾸 만들려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봅니다. 저는 살면서 줄곧 할머니를 흉내 내어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노련하던 당신과 달리 저는 언제나 서투르기만 합니다. 할머니는 어렸던 저에게 세상 그 자체였습니다. 저를 스쳐 간 이들은 모두 당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왔을 때처럼 세상은 여전히 넓고 신비하고 놀랍습니다. 제가 겪어봐야 할 것을 다 경험했는지, 만나야 할 이들은 다 만났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뭔가 알게 되겠거니 했건만 별로 그렇지 않네요. 할머니가 가신 이후 누구의 마음에 저를 붙들어 매야할지 몰라 막막했습니다. 다만 막연히 떠돌다 떠내려가지 않도록 가족과 친구, 애인과 동료들이 닻이 되어주었어요. 이들을 만난 것은 정말 좋은 일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맙고, 사랑받아 행복했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보지 못했던 나의 할머니, 김춘자 여사님. 이제는 보내드리고 저도 가벼이 떠나도록 할게요. 제가 할머니의 첫 손주라서 기뻤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감탄하는 마음으로, 삶을 경이롭게 바라보려 애썼습니다.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만큼은 세상에 돌려놓고 가는듯해 크게 여한은 없습니다. 할머니를 만난 덕분에 참 다행한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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