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대 시간 vs 제한적 시간
일요일 오후 8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다른 지방에 살고 있는 친구와 쉴 새 없이 통화하더니 뜬금없이 거기로 간다고 한다.
통화를 듣던 그녀는 감이 왔다. 지금 그가 나가면 오늘이 아닌 내일 들어온다는 예감을......
"안돼! 지금 나가지 마. 나가면 이혼 생각하고 가."
그녀는 일부러 그와 통화 속 남자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가면 이혼이란다." 잠시 30초 동안의 침묵이 흐르더니 "어딘데? 차 보내라. 그러면 갈게."
그녀가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도 갈 거라는 걸 알았지만 한동안 방랑하던 생활을 참는가 싶었더니 그놈의 친구가 불을 질러버렸다.
"차 보내준데. 갔다 올게." 그녀 허락은 안중에 없었다.
하긴 그 나이에 부모도 아닌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안 받고 차이가 있을까.
그녀도 알지만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가 미웠다.
"당신도 이 시간에 나가고 내일 올 거니, 나도 다음에 저녁에 나가서 다음날 들어와도 아무 소리 하지 마."
그는 그려려니 하며 대충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시간에 자유로웠다. 자신이 누릴 시간은. 하지만 아이들이나 아내가 저녁에 나가는 건 보지 못했다.
하루는 그녀가 아이들 데리고 서울에 간 적이 있다. 1박 2일임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전화를 해서 '스토킹'아니냐며 주변인들에게 한 소리 들었다.
"넌 도대체 어떻게 살아거니? 네 남편도 참 심하다. 모르는 곳 간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의심해서 계속 전화인지." 화끈 달아오르는 열기와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에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그는 왜, 도대체 왜, 그녀를 감시하는 걸까.
자신을 유독 감시하는 그 때문에 그녀는 살기 싫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와의 이어진 끈을 놓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혼자라면 상관없었지만 아이 데리고 살 자신이 없어 그저 그녀 나름대로 그를 대했다.
또다시 그의 간섭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려고 하자 이제는 그녀도 당하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름 준비를 했다.
사실 그는 혼자되는 게 무서웠다.
십 대도 아니고 사십이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었다.
남들은 아내가 자리를 비우면 쾌재를 부른다고 했건만, 그는 집에 아내가 없는 게 싫었다.
몇 년 전 아이들과 아내가 해외로 여행을 갔을 때도 쓸쓸했다.
갱년기인가. 이상하게 아내 빈자리가 좋지 않았다. 딱히 그녀가 옆에 있어도 즐거운 건 아니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아내가 없으면 허전하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가 오로지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 아내였다.
그녀에게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렇다는 말을 들으니 쓸쓸했다.
"저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천사 같은 아내를 얻은 거고?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니면 이런 대접을 받을 리가 없다. 성질도 까칠하고, 술고래에, 성깔도 있으며 보수적인데 어쩜 그리 대접받고 사는지......" 그의 지인들은 늘 말했다. 그의 아내가 그를 대접해 주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어떨 때는 그런 그가 부러웠는지 없는 말을 지어내면서 그와 그녀 관계에 금이 가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녀가 돈을 몰래 숨겼다는니, 그 돈으로 여행을 갔다니 하면서 그를 떠보았다. 근거나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 그였지만, 주변에도 하도 그러니 그녀를 의심해 그날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이혼' 이야기가 절로 나오며 커다란 그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말한다. 사랑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그가 믿지 않는 건 그녀 행동이 얼랑뚱땅이라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연못에 돌멩이 하나 던진 이유로 그와 그녀 관계에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동안 가정에 충실하게 지냈다. 돈도 덜 쓰려고 나름 아껴 쓰고 있었고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챌린지도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잔소리 안 하기, 가능하면 돈 덜 쓰기, 친구들 만나는 거 자제하기 등. 하지만 이날은 왠지 나가고 싶었다. 거기 가면 그는 대접을 받았다. 어릴 적 꿈이었던 연예인이 된 것처럼 대접해 주는 그곳이 그리웠다. 그녀 말에 신경이 쓰였지만 매몰차게 무시하고 현관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