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20분. 쌀쌀해진 공기를 흡입하며 거리로 나서는 순간, 분주한 발걸음들이 조용했던 길을 깨우기 시작한다. 횡단보도 근처로 하나둘 모여드는 발걸음 주인공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 고등학생이다. 멀리서도 보이는 피곤한 얼굴은 우리나라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표정이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며 발걸음은 종종걸음으로 바뀐다. 가끔 건너면서 친구 이름을 부르는 학생이 더러 있다. “ooo냐!”라고 불으면 애써 대답하지 않고 손짓으로 그만 불러라는 수신호를 보낸다. 커다란 가방이 등에 짊어진 오늘의 무게를 상징하듯, 아이들의 발걸음은 땅을 짓누르며 경보하듯 학교로 향한다. 그 육중한 무게 때문에 종종걸음이 아닌 끌리는 듯한 걸음처럼 보인다.
한편 버스 정류장은 옹기종기 모여 선 이들로 붐빈다. 따뜻해진 버스 정류장 자리는 어르신들로 만석이고,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버스를 놓칠까 봐 매의 눈으로 버스 오는 길목을 응시한다. '곧 도착'이라는 전광판 안내를 확인하는 순간, 그 바쁜 마음들 속에서 약간의 질서가 발현된다. 긴 줄을 서는 그 발걸음은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는 다짐으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버스 문이 열리자 놓치면 안 된다는 각오로 날쌔게 승차한다. 도로 주변의 이른 아침 풍경은 바쁨의 연속이다.
오전 9시 10분.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빠져나간 도로는 이내 한숨 돌리듯 느슨해진다. 하지만 이내 그 뒤편, 20년 넘게 동네를 지킨 생활체육관으로 또 다른 경쾌한 발걸음들이 분산해 움직인다. 노란 버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른들의 수다 소리는 아침 등굣길의 속닥거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활기차다. 남녀 상관없이 또 다른 생활공간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흥얼거리는 노래같이 들린다.
활발한 발걸음은 정오가 다가오면서 속도가 느려진다. 여유가 보이고 느긋함이 전해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발걸음은 병원으로 움직인다.
오후 4시경. 무겁게 올라갔던 그 발걸음은 미끄럼 타듯 리듬을 타며 내려온다. 하굣길의 재잘거림은 조용했던 등굣길과 사뭇 다르다. 가방의 무게는 여전하지만, 발걸음에는 자유가 묻어난다.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 역시 한층 밝아진 모습으로 하차하며 그들만의 언어로 수다하기에 바쁘다.
저녁 6시가 되어가면 도로는 더 분주해진다. 발걸음은 도로를 메우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힘찬 속도를 내며 걸어간다.
밤 10시. 거리는 하루를 마감하며 조용해진다. 모두가 내일을 위해 발걸음을 멈추는 시간. 하지만 까만 도로 반대편, 유난히 밝은 학원가에는 아이들의 미래를 향한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곳의 발걸음만이 내일의 희망을 품고 가장 늦게까지 움직이는 듯하다.
하루 동안 우리 동네를 맴돌았던 수많은 발걸음. 무거운 다짐으로 시작했던 아침의 발걸음부터, 경쾌한 환희를 담은 정오의 발걸음, 그리고 미래를 향한 조심스러운 밤의 발걸음까지. 이 모든 걸음은 결국 오늘 하루를 엮어낸 실타래였다.
동네를 가득 채웠던 이 발걸음들은 곧 내일 아침, 다시금 새로운 무게와 방향을 안고 거리로 나설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소리일지라도 내일은 삶을 향해 떼어놓는 크고 작은 움직임의 리듬인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나는 어떤 발걸음을 떼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