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동네 이야기
12월이다. 위쪽 지방은 첫눈이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부산은 조금 더 차가워진 공기에 여기저기 옷을 꽁꽁 싸매고 다니기 바빴다. 총총걸음으로 걷다가 유난히 들어온 울긋불긋한 색깔에 미소 짓는다. 단풍이 끝났고 생각한 골목에 보이는 잎들은 어디서 온 걸까?
이상하리만큼 위쪽 지방은 알록달록한 단풍잎이 풍성한데, 부산은 노란 은행잎이 한 아름이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은행나무가 없다. 골목에 있는 나뭇잎들은 어떤 나무일까?
고개를 올려 나뭇가지를 따라가 보니, 그 끝에 매달린 몇 안 되는 잎들이 바로 그 울긋불그 한 색이었다. 아, 이 나무는 봄의 전령사, 벚나무였지.
꽃이 활짝 피게 되는 3월, 4월이면 양쪽 도로변에 벚나무들이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터널 모양 벚꽃들은 아니지만 양쪽으로 길을 터주는 모세 기적처럼 분홍색이 남발하는 그때가 되면 ‘봄’이 왔음을 알게 된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불기라도 하면 벚꽃 잎이 휘날리며 떨어진다. 그 꽃잎을 줍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를 간혹 보게 된다. “엄마, 저 오늘 벚꽃 날리는 거 주웠어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하며 흥분으로 연분홍색으로 물든 아이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면 사람들 표정도 밝아진다. 아니 설렘으로 가득하다. 괜히 미소 지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인사 나눈다. 벚꽃놀이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들뜬 모습이 순수한 아이로 돌아가는 듯하다. 집 근처 고등학교에서도 핀 벚꽃은 여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찰칵’ 사진 소리로 운동장을 가득 메운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을 위해 벚꽃을 배경으로 졸업사진 찍느라 들리는 들뜬 목소리는 봄날 여신 같다. 그렇게 우리 동네에서는 봄이 옴을 연분홍빛 설렘으로 알게 된다. 꽁꽁 싸맨 옷 속에서도, 이 울긋불긋한 벚나무 잎을 보니 문득 깨닫는다. 이 작은 낙엽이 나에게 알려주는 것은 ‘겨울의 끝자락’, 그리고 곧 다가올 ‘봄의 예고’라고.
"봄의 예고"라고 되뇌는 순간, 문득 벚나무의 가을 얼굴이 떠오른다. 연분홍 꽃이 졌던 자리는 어느새 짙푸른 녹음으로 가득 찼다가, 여름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조용히 변신을 시작한다. 가을의 벚나무는 은행나무처럼 강렬한 노란빛을 내뿜지 않는다. 마치 비밀을 간직한 듯, 노란빛과 붉은빛이 뒤섞여 은은한 갈색조로 물든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벚꽃 잎을 줍던 그 길에, 이제는 바스락 소리를 내며 조용히 쌓이는 단풍잎이 대신한다. 봄이 '환영'이라면, 가을은 '성숙한 작별 인사' 같다. 벚꽃이 필 때의 들뜬 웃음소리 대신, 아파트 벤치에 앉아 묵묵히 떨어지는 잎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바로 벚나무가 알려주는 가을 모습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나라는 고민할 때 문득 벚나무 단풍은 아직 가을임을 알려준다. 패딩보다는 가벼우면서도 가을을 즐기는 옷을 입으로 권한다.
어쩌면 벚나무는 일 년 내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 같다. 생의 가장 눈부신 순간(꽃)이 지나고 난 후에도, 가장 고요하고 사색적인 순간(단풍)이 찾아온다는 것을. 봄날의 환한 웃음과 겨울 초입의 묵직한 침묵. 어쩌면 그 상반된 얼굴이 모두 '나'라는 것을. 골목에 쌓인 이 울긋불긋한 작은 벚나무 잎처럼, 우리의 삶도 환희와 고요함, 그 이중생활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떨어진 낙엽을 주워 다가올 봄의 설렘과 지금 이 순간의 고요함의 반짝임을 만끽하고 싶어진다. ( 1,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