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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를 아시나요?

‘눈부신 안부(백수린)‘를 읽고

by 하이브라운

파독 간호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한 해외인력수출의 일환으로 한국정부에서 독일(서독)에 파견한 1만여 명의 간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직장에서 매년 초, 직원을 대상으로 도서 구입 신청을 받는다. 작년부터 관심을 가졌던 작가들의 작품을 신청했다.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을 읽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내게 다가왔던 신선한 충격들과 감동을 동료들 또한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중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라는 작품을 신청했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기도 했고, 가장 먼저 검색이 되어 많은 생각 없이 신청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웬걸, 너무 좋았다. 작가의 단편과 에세이만 읽었는데, 장편을 이렇게 잘 쓰는 작가인지 몰랐다. 사람마다 맞는 소설가가 있나 보다. 그것도 성향이나 생각이 비슷하다면 작품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큰 물결을 일으킨다.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에서 알게 된 일상이나 소설에 깃든 생각들은 나의 그것들과 매우 닮아서 놀란 경우가 많다.(제가 조금 섬세합니다. 정말입니다.)


그간 단편 위주로 소설을 읽었다. 상황 설명이나 배경 설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장편에 조금은 지루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러한 문장들조차 섬세했고 따뜻했으며 아름답게 느껴졌다. 또한 소설의 구조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플롯이라는 이야기의 구조가 너무 좋아서 다양한 사건이 각각의 물줄기로 굽이쳐 흐르다 한 곳의 목적지로 합류하는 것 같았다. 큰 강을 이루어 뒤돌아 보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한 것 같은 풍요로운 느낌.

많은 훌륭한 소설가들이 있지만 나와 잘 맞는 소설가를 찾았다는 사실은 크나큰 기쁨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다양한 소설의 형식이나 내용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아직 되지 못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독으로 같음의 편안함과 더불어 다름의 궁금함에도 빠지고픈 바람이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족의 지속되는 슬픔. 슬픔을 잊기 위한 독일 생활. 그곳에서 자신들을 찾아가는 과정. 독일에서 함께하게 된 이모와 이모들(모두 파독 간호사였고, 이모의 동료들을 이모라고 불렀다). 슬픔의 그림자로 사랑이 사랑인지 몰랐던 대학 시절 친구와의 재회, 그리고 다시 키워 가는 감정. 이야기의 포인트들이다.

작가는 위의 이야기들을 서로 엮어가면서 파독 간호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들을 덧붙였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독일로 이주했던 한인 간호 여성들을 희생이나 애국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해서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그녀들은 훨씬 진취적이고 급진적으로 살았던 실존 인물이었다.” 말한다.

실제로 작품 속 등장하는 파독 간호사 이모들은 각자의 삶을 멋지게 그리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고국을 떠날 때의 슬픔과 두려움은 그들 삶의 조종간이 되지 않았다. 단지 출발점이었을 뿐. 고난과 희생의 시간도 있었지만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 또한 그녀들과 함께하며 삶을 그려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삶이라는 그림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쨌거나 우리는 길을 가야 하는 존재들. 비틀거리거나 쉬었다 가더라도 걸어야 하는 존재들. 어둡고 음침한 곳을 지나기도 하지만 밝고 상쾌한 바람을 맞는 존재들. 슬픔이라는 출발점은 저 멀리 보이지도 않도록 먼 곳을 가야 하는 존재들.


아픔이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족을 잃은 아픔을 파독의 아픔이 위로한다. 파독의 아픔은 가족을 잃은 아픔이 위로한다. 아픔이 아픔을 잘 알기에.

작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지닌 사건은 주인공이 독일의 이모의 첫사랑(KH)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언니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해미(주인공) 자신을 찾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거짓말을 하며 위기를 모면하는 순간 또한 자신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의 도움을 받아 하나씩 단서를 찾아 결국 첫사랑을 찾는 것은,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로 인하여 나를 찾는 과정이고, 슬프고도 아릅답다.

덧붙여 작가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작품에 묻어난다. 잊고 지냈지만 아직도 슬픔이 깨끗이 씻어나가지 못한 사건들, 사고들. 5.18 광주 민주화운동, 가스폭발 사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제주 4.3 사건 등.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 좋다.

지난여름, 초등생 자녀가 유럽으로 3주간의 교회 여름 캠프를 다녀왔다. 중요 일정 중 독일에서 파독 간호사를 위한 공연과 사은 행사가 있었다. 공연을 위해 4개월 전부터 합창과 율동을 연습했다. 베를린의 한인 교회에서 파독 1세대 어르신을 모시고 감사 편지 낭독과 합창, 옛날 장터 재연, 추억의 선물 증정 등의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동행하지 못한 나는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영상을 감동으로 시청했다. 오빠 생각, 섬집 아기, 아리랑 등의 합창은 초등생 목소리로 울려 퍼져 눈물 날 듯 구슬펐고, 공연 후 손자손녀를 만난 듯 끌어안고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눈물이 났다.

이 순간에 아이들에게는 희생과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컸겠지만, 할머니 가슴속 깊이 응어리져 있었던 슬픔과 외로움에 대한 위로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분들 또한 출발선의 슬픔은 있었지만 각자의 삶을 멋지게 걸어오셨고, 그 삶에서 채울 수 없었던 외로움을 아이들로 조금은 채웠으리라.


예전과 다르게 요즘 휴가를 떠날 때, 책을 한 권 들고 가는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진정한 휴가는 신체와 정신 모두 일상을 떠나 쉼으로써 회복하는 것이다. 유명 관광지와 해외를 다녀와도 왠지 쉰 것 같지 않은 것은 몸은 편할지라도 생각은 여전히 일상에 묶여 있어서라고 한다. 책을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무엇인가에 몰입하여 일상을 잠시나마 잊는다면 멋진 휴가지의 편안함에 더하여 최고의 휴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올해 휴가에는 백수린 작가의 ‘폴링 인 풀’과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를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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