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아니고요, 책에게 간택당했습니다.
언젠가 엄마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책은, 그냥 쉴 때 읽는 거라고. 그 정도로 열심히 안 읽어도 된다고. 내가 무슨 1년 365일 활자만 읽는 인간이라 엄마 목구멍에서 그런 말이 톡 튀어나온 건 아니다. 학업에서 가장 중요한,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시기인 열아홉에 공부는 뒷전이고 책만 보고 있으니 엄마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지는 것이다. 일종의 도피였다, 아마. 그렇게라도 무시무시한 칸트와 빈칸 지문과 코싸인 함수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도피처를 제공해 준 책도, 시간을 반추해 보면 도피처가 아닌 안식처였다. 중학교 때 딱 그랬다. 아침 자습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남들 전부 게임슬롯 당기듯 sns를 새로고침할 때, 그 속에서 벽돌만 한 하루키의 책을 보고 있노라면 지적허영심이 배가 되어 마치 온 세상 모든 교양을 다 긁어모은듯한 지식인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더하여 책을 항상 반려동물처럼 옆에 끼고 사는 친구와 친해진 것도 한몫을 했다. 친구가 최은영, 김애란 작가 이야기를 할 때면 “너무 좋지 않아?”하고 눈을 윤슬처럼 반짝였는데, 그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 내 인생의 한 조각이 됐다.
그 친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최은영 작가가 좋다. 김애란 작가도 좋지만 문체가 우울해 그리 마음이 가진 않는다. 대학생이 된 요즘은, 학교나 누가 떠먹여 준 작가들보다는 내 스스로 문학의 스펙트럼을 넓히며(그래봤자 읽고 싶은 책 읽는 거지만) 최애작가 발굴작업에 나섰다. 보통은 도서관에서 표지와 제일 첫 장을 보고, 첫 장이 술술 읽힌다 싶으면 그 책을 뽑아 든다. 공손히 집까지 모셔와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때론 비둘기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한 문장씩 읽는데 특정 문장이 내 가슴과 머릿속에 찌릿, 하고 벼락을 내리면 그때부터 그 작가와의 사랑이 시작될 확률이 높다.
어떤 책이든 다 읽고 나면 작가를 찾아보는 편인데, 제우스처럼 나에게 벼락을 내린 작가는 더 면밀히 서치 한다. 일단 나무위키에 들어가 작가의 생애 연도와 겪은 일 등을 한 글자씩 정독하고 주로 어떤 책을 출판했는지 훑어본다.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입꼬리는 올라간다. 제우스가 출판한 걸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꼭 기회가 되면 읽어보리라 혼자 결심한다.(물론 직접 찾아서 읽지는 않는다.)
굉장히 신기한 경험을 두어 번 했는데, 내가 읽어봐야지, 한 책들은 운명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고양이에게 간택당하곤 하는데, 난 책에게 간택당하는 것 같다.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 시대>도 도서관 문학 서고를 서성이고 있을 때, 내 앞으로 어떤 남자가 다가와 스윽 꽂고 갔다. 안 그래도 이슬아 작가의 팬이고 <가녀장 시대> 어감이 되게 북한 같다, 라며 기억해 둔 책인데 이렇게 만나다니. 놀람을 금치 못했다.
두 번째로 박서련 작가의 <나, 나, 마들렌>이 그랬다. 도서관 카드 대출을 다 해버려서 빌리지 못한 책이었는데, 바로 그날 그 책이 꽂힌 서가에는 <나, 나, 마들렌>이 없었다.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후 실망했다는 사실, 책의 존재여부까지 잊어버린 채 다른 도서관에서 문학 파밍을 하고 있었는데, 내 눈에 딱 들어오는 한 권. <나, 나, 마들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책은, 책에 대한 사랑은 이성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크고 충만한 것 같다. 엄마 말대로 열심히 안 읽어도 되는 게 바로 책이긴 한데,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어떻게 열심히가 안될 수 있으랴. 나는 더 사랑하련다. 책을, 그리고 내 인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