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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Jan 24. 2024

생명수 찾는 독립운동가의 생을 목도하여

바리데기 신화를 빌려 펼쳐지는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일생

1. 나의 무지의 일화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말을 들으면 학부생이었을 적 강의실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영국인 선생님으로부터 영어로 영국 문화를 배우는 교양 수업이었는데 그날은 선생님이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질문했다. 화제가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으로  흘러갔던 것 같다. 수강생들은 저마다의 영어 실력으로 익히 아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설명했는데, 선생님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다른 시간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물론 이 반의 학생들까지 왜 여성 독립운동가로는 오로지 유관순 열사 한 명만 언급하냐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답답해 하며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재차 물었지만, 나를 비롯해 다른 학생 모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부끄러움이란 지금도 말로 다하기 힘들다.


감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거사에 필요한 물품을 운반했던 여성, 독립운동에 필요한 많은 분량의 기밀 정보를 하룻밤새 암기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했던 여성, 남편과 함께 일가가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쳤던 여성, 여성들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격문을 썼던 여성, 3.1 운동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그 분들의 이름은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권을 누리고 사는 우리의 지금을 만들어준 분들에게 후손으로서 최소한 해야할 도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너무 아는 것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나 외에 다른 학생들도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더 알지 못하는 데에서 우리나라 공교육과 문화 저변에 대한 문제의식도 생겼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추게 되는 여러 교육, 문화 향유의 시간 동안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알아가게 만드는 부분이 심히 미진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의식이었다. 


나의 무지의 일화는 벌써 십 여 년 전의 일로, 그간 사회에서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일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활동, 생애에 대한 정보가 발굴되었다. 참으로 반가운 변화다. 그러나 대중에게 그들의 삶과 업적이 기존에 알려진 남성 독립운동가들 만큼 존재감이 있는가, 오래 기억되는가는 또 다른 문제라 보인다.


임신한 몸으로 폭탄을 던졌던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대동 출생의 ‘여자폭탄범’ 안경신의 일생을 다룬다는 연극 <언덕의 바리> 소개글을 읽었을 때, 외국인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 못하던 내가 떠올랐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와 삶에 대해 너무 무지한 내 상태가 다시 한 번 싫어졌다. 이번에는 오늘날을 만들어 준 사람의 얼굴을 알고 절절히 느껴서 그 생을 깊이 기억하고 싶어졌다. 


 


2. 다시 태어나는 경신의 삶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보인 것은 무대 위의 객석이었다. 검은색 평평한 바닥으로만 이뤄진 무대를 삼면으로 둘러싼 객석이 있었고, 나머지 한 면은 원래 객석으로 쓰던 좌석 쪽으로 트였다. 좌석 열마다 무성한 갈대를 두었고 공중에는 나무로 된 배가 걸려 있었다. 아하, 극장의 지형을 활용해서 저 곳을 언덕으로 만들었구나. 그렇다면 저 허공의 배는 무엇일까. 답은 극이 시작되며 곧 알게 되었다. 


등이 굽은 노파였다가 등을 곧게 펴고 젊은이가 되기를 반복하는 한 여성이 어딘가를 향해 바삐 움직인다. 음성과 말투가 두 나이대를 번갈아 오가는 속에, 여인의 정체와 사연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은 경신이고,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 속에 죽어간 어린 여학생들을 되살리기 위해 그곳이 연옥인지 완전히 저승인지조차 불분명한 꿈속 세상에서 생명수를 찾고 있다. 경신은 자신의 사명-생명수를 찾는 이유-을 떠올릴 때마다 투쟁하던 청년으로 돌아가 뱃속에서부터 울분의 소리를 끌어올린다.


생명수를 찾아 저 너머 세상, 즉 현세로 가는 길에 만난 소년 뱃사공은 경신에게 길 안내를 해주는 대신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곳에 붙박혀 늘 같은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연유를 알려달라 부탁한다. 소년은 경신에게 세계를 오가는 법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이 언덕을 오르면 가려는 곳으로 갈 수 있고, 그곳에서 다시 여기로 오려면 또 그곳의 언덕을 오르면 된다고. 그럼 자신이 길 안내하러 찾아가겠다고.   



언덕을 오른 경신은 생전 자신의 삶으로 회귀한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 경신이 한 맺혀 생명수를 찾게 하는 원인이자 전생인 동시에 아직 수많은 삶의 선택, 흔들림이 경험되지 않은 채 앞에 놓여 있는 현재의 삶 그 자체다. 경신이 지난 삶에 돌아감과 동시에 그 삶에 녹아들수록 지나갔던 삶은 다시 현재가 되어 경신에게 고뇌와 고통을 안겨준다. 


애국부인회 교통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전달하던 경신은 평화적으로 시작했던 3.1 운동 참여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직접 무력투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경신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온 덕진에게 뜻을 전하지만 유혈투쟁에 여성인 당신은 연약하다며 거절 당한다. 여기에 평양기생 명희와 앞잡이 역할을 하던 조선인 경찰 현강의 속임수 때문에 애국부인회가 검거된다. 이후 경신은 몸을 낮춘 채 한동안 일본과자점 점원으로 일하며 지낸다. 


경찰의 감시 속에서 살던 경신은 어느날 경찰에 쫓기는 행일을 숨겨준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경신은 행일의 도움으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간다. 심지가 곧은 경신은 혼란한 세상 속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늘 강풍에 날려다니는 동작을 하는 행일에게 함께 할 어깨를 내어준다. 행일과 동거하는 동안 경신은 덕진을 다시 만나 광복군총영 대원을 자원한다. 문제는 행일이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는 데에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경신은 행일과 이별하고, 자신은 ‘평범하게’ ‘남자의 여자’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금 되새긴다. 동포들이 죽어가는 지옥을 끝내기 위해 자신은 고통의 지옥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경신이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치는 전사 혹은 군인이 되기 위해 지옥에서 태어남을 천명했지만, 행일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경신의 의지에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그래도 임신한 몸으로 폭탄 제조 훈련 받는 경신이다. 꿈속 세상의 일은 기억에 없지만 그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찾은 생명수는 독립의 염원을 담아 던지는 폭탄이었다. 쫓겨다니면서도 거사를 준비해야 하고 항상 자금은 부족하기 때문인지 정신 없는 동작을 반복하는 동료들. 그들은 폭탄의 뇌관은 복잡하고 섬세하여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경신이 속한 평양타격대 2조가 평양 평남도청에 던진 폭탄은 비의 영향으로 불발된다. 


산통을 느낀 경신은 명희의 집에 몸을 숨긴다. 명희는 폭탄보다 너의 아이를 지키라며 경신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만 경신은 폭탄을 다시 던지기 위해 뛰쳐나간다. 그러나 아이는 경신의 뜻을 짓밟으며 세상에 나오려 하고, 산고로 쓰러진 경신은 결국 현강에게 체포된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기를 자처했던 경신은 일본인 검사와의 조사과정에서 자신은 연약하고 무지한 어미일 뿐 폭탄범이 아니라고 진술한다. 경신의 태도 변화는 진심일 수도 있고 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다. 경신은 한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혈투쟁에의 참여를 만류 받은 적 있지만, 경신이 갓난아기를 안은 어미가 된 지금 폭력은 그것을 가리지 않고 쏟아진다. 일본인 검사는 경신에게 어미인 척 하는 너 같은 인간을 진짜 어미로 만드는 법을 안다며 아기를 해할 것을 암시한다. 언젠가 경신이 말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두려움이라는 인간적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강력한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 중에 가장 약한 것을 부숴버린다는 내용처럼. 경신의 처절한 비명을 끝으로 현세에서의 장면은 손 쓸 수 없는 악몽처럼 멀어진다. 


다시 돌아온 꿈속, 뱃사공 소년이 다가와 경신을 인도한다. 경신은 소년의 큰 죄목을 알려주지만 소년은 언젠가부터 자기 죄목을 더 자세하게 알고 있다. 자신은 태어남과 동시에 누군가를 지옥 밑바닥으로 처박았었다고. 그래서 여기서 끝나지 않는 노역을 하며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그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계속 여기에 있나봐요. 


“사람들이 날 언덕의 바리라고 불러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버렸다고.” 


 소년, 언덕의 바리는 경신의 아들이었다. 



3. 바리데기 신화 함흥본과 <언덕의 바리>


<언덕의 바리> 소개글을 보며 제일 궁금했던 것은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이야기와 바리데기 신화를 어떻게 엮어내는 것인지였다. 당장 경신과 바리데기의 공통점이라곤 둘이 여자라는 것 뿐인데다 둘은 역사 속 실존 인물과 신화 속 인물이라는 점도 너무 다른데 둘 사이의 접목은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그리고, 왜 하필 ‘언덕’의 바리인 걸까? <언덕의 바리>가 여러 버전의 바리데기 신화 중에서 함흥 지역의 버전을 차용했다는 것을 알고 의문 해소의 실마리를 얻었다.    


3-1. 바리데기 신화 서울경기본과 함흥본의 비교


안경신은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거사를 치른 인물이니 그의 인생에 바리데기 신화를 접목한다면 서울경기지역본보다는 함흥본을 택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함흥본 전체 줄거리를 알고 나면 경신의 이야기에 함흥본을 접목한 이유가 더 납득이 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리데기 신화가 서울경기본이다. 어느 국왕 부부의 일곱 번째 공주로 태어난 바리데기가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버려지지만 무사히 성장해 돌아오고, 병든 친부모를 위해 저승에 가 고난 끝에 약수(생명수)와 환생꽃을 구해오고, 이승에 돌아와 죽은 부모를 살려낸다. 비로소 자신을 환대하는 아비의 제안을 거절한 바리는 저승에서 보았던 망자들을 연민하며 그들을 인도하는 무조신(무당의 조상 또는 시조 격인 신)이 된다. 영웅의 숭고함과 바리데기라는 무조신의 연원을 알려주는 신화인 셈이다.  


반면 함흥본은 우리가 익히 아는 판본과 다른 점이 많다. 서울경기본에 비해 세속적인 면과 골계미가 두드러진다. 함흥본 바리의 부모는 인간 왕족이 아니라 옥황상제의 선관과 선녀였다가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유배 온 수차랑 선배(선비)와 덕주아 부인이다. 자식이 없어 고민이었던 부부는 점을 보는데 첫째가 딸로 태어날 경우 딸을 모두 일곱 명 낳을 것이고 그러면 집안이 망할 것이란 말을 듣는다. 설마설마하던 부부는 여섯째까지 딸로 나오자 아이를 더 가지지 않기로 하지만, 수차랑 선배가 자신이 한 말을 어기고 덕주아 부인을 임신시킨다. 가족들과 잘 살던 수차랑 선배는 돌연 자기 죄가 가벼워졌다며 모든 가족들을 지상에 내버려두고 승천해 버린다. 일곱째가 아들로 태어나면 서신을 보내고 딸로 태어나면 돌함에 넣어 용늪에 버리라는 말과 함께. 서울경기본 바리데기의 친부가 비정할 정도로 가부장적인 위계 속에 사는 인물이라면 수차랑 선배는 무책임하고 이른 퇴장으로 존재감이 약한 편이다.  


바리데기 이야기인 만큼 일곱째는 역시 딸로 태어났다. 덕주아 부인은 남편의 말대로 행동하는데, 바리데기를 버린 시점부터 병에 걸린다. 우연히 용늪에 왔던 수궁용왕의 부인이 바리를 구조하고 자기가 낳은 아이라며 수궁용왕을 속인다. 바리데기는 열댓살까지 용궁에서 용왕의 딸로 자라며 ‘수왕’이라는 이름을 갖기도 한다. 수왕이는 양부의 관대관복을 하룻밤새 지어 주지만 도리어 이 일을 계기로 양부 수궁용왕이 수왕이가 자기 친자가 아님을 알게 되어 수궁에서 쫓겨난다. 함흥의 바리는 두 번 버려진 셈이다. 


바리데기는 여섯 언니들과 친모를 찾아가지만 처음에는 가족으로부터 귀신 취급을 당하다가, 출생의 증표를 보이고서야 친자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랜만의 상봉도 잠시, 바리는 친모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직접 점을 치고, 점괘를 따라 약수를 찾기 위해 서천서역국으로 떠난다. 이때 바리는 다른 지역본과 달리 따로 남장을 하지 않는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리가 길을 묻는 이들은 죄를 지어 매일 같은 노역을 하고 있는 이들인데, 이들은 길을 알려주는대신 바리에게 자신들의 죄상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부탁을 받고 후일 그들의 죄목을 알려주는 것이 서울경기본 바리데기와 또 다르다. 바리는 저승에서 위기를 겪지만 지혜롭게 탈출한다.


저승에서 나온 함흥본 바리데기는 용늪에서 울다 옥황상제가 내려준 연등(혹은 가마)을 타고 옥황(천상)에 올라간다. 옥황상제의 후손과 결혼하여 열두 명의 아들을 낳은 바리는 천상 꽃밭을 관리하는 남편을 통해 환생꽃과 약수를 얻는다. 바리는 꽃을 몰래 훔치는데, 개화한 꽃과 봉우리 진 꽃 상관 없이 꺾어 가져갔다. 떠나기 전 바리는 열두 아들들에게 시왕 신직을 부여한다. 꽃을 분간 없이 훔치는 데서 숭고한 영웅적인 면보다는 골계적인 면이 드러난다. 그러다가도 신직을 부여하는 권능을 보인다. 양면성이 도드라지는 바리데기라 할 수 있겠다. 


바리는 다시 지상으로 와 환생꽃과 약수로 친모 덕주아 부인을 살린다. 여섯 언니들은 죽은 어미를 애도하긴 커녕 재물다툼을 하고 있다가 소생 소식을 듣고는 숨어버린다. 덕주아 부인은 여섯 딸에게 저승 보물을 나눠주겠다고 꾀어 모이게 한 뒤 살을 날려 여섯 딸 모두를 죽게 만든다.  여섯 딸을 묻고 돌아오니 이번엔 바리가 아프다. ‘미운 파리 잡으려다 마음에 드는 파리 잡는다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며 놀라는 덕주아 부인에게 바리는 자신을 삼일고개에 묻어달라 말한 뒤 죽는다.


막내딸의 삼일제를 치뤄주기 위해 가던 길에 덕주아 부인은 서일대사와 마주친다. 서일대사는 죽은 바리데기가 생불이 되어 덕주아 부인을 잡아먹을 준비 중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겁 먹은 덕주아 부인은 삼일제를 올리지 않고 서일대사의 또다른 거짓말인 존재하지 않는 잿밥을 찾으러 다니다 삼 년 묵은 보리그릇에 엎어져 죽는다. 다소 허무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전해져 오는 함흥본의 결말이다.  


정리하자면 함흥본의 큰 특징으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부재, 골계미가 돋보이는 서술, 용궁에서 자라나는 바리데기, 저승으로 길을 떠날 때 남장을 하지 않는 바리데기, 저승길 길목에서 만난 망자들이 바리에게 길을 알려주는 대신 자기 죄상을 알아달라 부탁하는 것과 바리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 저승이 아닌 천상에서 생명수와 환생꽃을 얻는 것, 그리고 여덟 모녀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다는 것이 있다.   



 

3-2. 바리들 


위의 특징을 <언덕의 바리>와 비교해 보면 몇 가지 묘한 교차 지점들이 보인다. 딸이라서 버려진 바리데기와 여성이기에 무장투쟁에의 합류를 거절 당한 경신. 성장해 돌아온 첫날 가족으로부터 귀신 취급을 받은 바리데기와 독립운동이 오래 되어 갈수록 우리는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귀신의 싸움을 하는 것이라 말하던 경신. 먼 길 떠날 때 남장을 하지 않는 바리데기와 임신한 몸으로도 무장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경신. 죽어가거나 죽은 이를 살리기 위해 생명수를 구하러 떠나는 바리데기와 경신. 이 두 인물은 길을 알려준 존재로부터 죄목을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공통점이 또 있다. 바리데기는 천상에 올라가 약수와 환생꽃을 얻었으며 경신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언덕을 오른다. 이야기의 큰 구성이 수직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흥본이 여덟 모녀가 모두 죽는 비극적인 결말을 하고 있는데, 극 중 경신은 생명수로 죽어간 여학생들을 살릴 수 없었으며 투쟁의 의지도 아들의 존재로 인해 제동이 걸린다. 


한편 함흥의 바리데기는 무조신이 되지 않았다. 서울의 망자천도굿인 새남굿과 달리 함흥본의 망자 천도굿인 망묵굿에서 망자를 저승길로 인도하는 존재들은 바리데기가 아니라 먼저 죽은 다른 망자들이다. 바리데기가 천상에서 낳은 아들들에게 시왕 신직을 부여했으므로 저승길 인도자의 역할이 그 아들들에게 위임되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생명수 찾는 경신의 아들이 또 다른 바리데기가 된 점이 또 한 번 함흥본의 특징과 부합한다. 


그렇다. <언덕의 바리>에서 바리데기에 비견되는 인물은 경신 한 명이 아니다. 소년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버려졌다는 이유로’ 언덕의 바리라 불린다. 신화에도 여러 판본이 있듯이, 어쩌면 이 세상 전체로 보면 바리는 한 명이 아닐 수 있겠다.


언덕을 오르는 경신은 망자를 연민하고 망자를 살리려 한다. 이렇게 보면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제 인생을 세상에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바리데기의 호연한 마음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소년이 또 다른 바리인 것처럼, 버려진 사람들은 바리데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사실 죄없이 죄인이 되어 버림 받은 존재들이다. 바리데기는 서울경기본에서는 대를 이을 왕자를 바라던 왕의 기대를 박살낸 딸이 되어서, 함흥본에서는 첫째가 딸이면 딸 일곱을 낳고 구족이 멸하리라는 점괘의 마지막을 성립하는 조건인 일곱번째 딸이어서 버려진다. 몇 번째 자식으로 태어날지, 무슨 성별로 태어날지는 태어나는 아기가 정할 수 없다. <언덕의 바리>에서 소년 바리, 즉 경신의 아들 역시 태어남에는 죄가 없지만 태어나는 그 순간 어미인 경신의 삶을 ‘지옥에 떨어트려’버렸다. 모두 ‘그저 태어난’ 아이 입장에서는 억울한 이야기다.


바리데기 신화를 결과적으로 보면 버려진 사람이어도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애꿎게 버려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로 사람은 살아가면서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을 이야기 속 선한 사람에게 의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버려진 시대에 태어났다고 스스로를 여기는 사람들도 광의의 의미로는 바리데기의 슬픔을 가질 수 있겠고, 어려운 일이지만 바리데기처럼 그 슬픔을 승화로 해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죄진 적 없이도 죄인이 되는 세상이라면, 고통을 최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사람의 소중하고 약한 것을 부숴버리는 인간들은 어떤 죄인의 모습으로 저승에서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자신이 살며 크고 작은 죄를 지었다는 반성을 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죄인으로 불릴지언정 자기 죄를 감할 기회나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일지도. 죄 지었다며 진정 아파할 수 있는 일조차 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3-3. <언덕의 바리> 속 ‘언덕’의 의미

 

통상 이승과 저승, 차안과 피안을 가르는 지형지물로 강이 등장한다. 경신의 꿈속 세상 역시 뱃사공 소년, 배, 물귀신 같은 물과 관련된 요소들이 언급되어 그곳에 사람 몸으로는 건너기 어려운 큰 물이 있음을 감지하게 하지만 직접적으로 강이라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 경계로서 강을 넘나드는 여러 신화와 달리 <언덕의 바리>에서는 언덕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여기에는 바리데기 신화 함흥본의 수직 구조가 극에 반영되어 있다. 서천서역국(저승)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약수와 환생꽃을 가져오는 서울경기본 바리데기의 구약여행(약을 구하러 떠나는 여행)이 수평적 구조라면 천상에 올라 약을 가져오는 함흥본 바리데기의 구약여행은 수직적 구조에 해당한다. 


또한 함흥본에는 적강, 승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가 여러 번 등장한다. 바리의 부모인 수차랑 선배와 덕주아 부인은 천상에서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유배를 온 적강한 인물들이고, 수차랑 선배는 돌연 자기 죄가 맑아졌다며 승천을 해버린다. 바리는 인간계가 아닌 수궁용왕의 세계에서 성장하다 내쫓겨 인간세계로 하강했으며, 저승에서 빠져 나온 후 용늪에서 옥황상제의 도움을 받아 옥황(천상)으로 상승한다. 친모를 구할 약을 얻은 뒤로는 다시 인간세계로 하강한다. 


반복되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는 <언덕의 바리>에서도 등장한다. 소년이 알려주길 경신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어 세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건너간 곳에서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려면 또 그쪽 세상의 언덕에 올라가면 된다. 


<언덕의 바리>가 생명수 찾기라는 신화적 설정을 가져온 만큼, 생명수를 얻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도 천상이라는 초월적 위치에 갔다와야만 성공 가능한 일이 된다. 함흥의 바리데기는 천상에서 약수와 환생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높은 산도 실제로 하늘에 닿지는 않는다. 하물며 경신이 오르는 것은 산보다 낮은 언덕이다. 하늘에 닿기 힘든 높이의 언덕이라는 요소는 경신이 꿈속 세상에서 생으로 되돌아가도 이미 죽은 이들을 살려낼 수는 없음을 암시한다. 한편 꿈에서 삶으로 건너간 경신의 싸움은 점점 유혈투쟁과 죽음의 폭탄으로써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싸움으로 굳어진다. 하늘에 닿지 않는 언덕이라는 요소는  목숨 걸고 던졌으나 불발된 폭탄과도 오버랩된다. 


도청에 던진 폭탄은 도화선이 비에 젖어 불발되었지만, 경신이 속한 평양타격대 2조의 폭탄 내지는, 거사 당시 실패로 돌아갔던 또 다른 투쟁들이 정말 ‘역사적인 면에서도 불발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당장 이 글만 해도 우리 신화를 연구하고 차용해 만들어진 연극에 대한 것이며 아무 억압 없이 한글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말 우리글로써 우리 언어 체계의 사고관 아래 쓰여 나가는 글이다. 강제로 남의 언어로 사고해야 할 일 없이.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 보자. 바리데기 신화 함흥본과의 비교 외에도 연극 내에서 언덕이 자체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있다. 산에 비하면 낮지만 인생의 흔들림, 혼란함을 생각하면 언덕 하나 곧게 올라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연극을 보는 우리야 역사를 알고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정해지지 않은 현재였다. 


극 중에는 평양기생 명희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는 자기 언니가 주변에서 독립운동은 ‘부추긴’ 사람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며 독립운동가를 증오한다. 실제로 독립운동가를 죽게 만들기도 하지만 당시 어렸던 경신은 살려주고 몇 번씩 처지를 봐준다. 그러면서 경신이 독립운동에의 뜻을 꺾기를 바라고 강요한다. 명희는 ‘지금 옳고 그르다는 게 백 년 뒤에 가서도 그대로일지 알 게 뭐람?’ 이라며 혹자를 비웃기도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명희는 독립운동에 참여했기에 일본인 손에 고문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은 언니의 인생을 허무하다고 여긴 것 같다. 그래서 언니와 같은 뜻을 가진 주변인이 뜻을 ‘꺾었기 때문에’ 안온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언니와 같이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영복을 고발해 죽게 만든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간 만큼,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서, 그렇게 경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것일 테다. 하지만 경신은 명희에게 말한다. “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이대로 사는 거예요.”    


혼탁한 현실과 타협해 얻을 수 있는 안온함에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란 말에 굴하지 않고 언덕을 끝까지 올라가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경신은 다시 한 번 바리이다. 무조신이 되지 않고 사람으로서 죽는 바리데기.   



 

 4. 과거를 우리의 현재로 펼쳐 놓는 연극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은 전세계에 있는 <파친코>의 독자가 모두 한국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파친코>를 읽는 동안 일제 강점기를 직접 겪었거나 그 후손인 한국인들의 삶을 이해해 보고, 함께 살아보고 그 입장이 되어보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잘 쓰인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소설 속의 인물이 된다. 소설의 긴 서사는 현재를 살아가기 바쁜 우리에게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지위에서 살아보게 만든다.  


(소설 읽기는) 잠시나마 타자의 삶에 깊이 연루되는 일이다. (...) 

사는 것도 어려운데 왜 가짜 삶(소설)을 겪어보겠다고 이 정성을 들이느냐고? 소설을 읽는 것은 다른 장르의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책이 사는 일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면, 소설은 한 편에 한 번씩 삶을 '살게' 한다.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한번 더 살아본 기분이 든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

책을 펼치면 그녀가 그려내는 모든 옛날이 '지금'으로 둔갑하여 도착한다. 끔찍하고 다정했으며, 처참하고 아름다웠던 모든 옛날이 현재형으로 펼쳐진다.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중에서 발췌  


비단 이런 서사의 힘이 소설에만 있을까. 나는 <언덕의 바리>에서 역사 속 실존인물인 안경신의 삶이 현재의 시간 속에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이는 고연옥 작가의 작의에 나타나 있다.  


"우리의 평범한 현재란 스스로 얼마나 약한지 알면서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민중들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반면 역사는 그들을 기표 안에 가둬 박제화하고 예술은 영웅화하거나 소거시키곤 했다. 동시대 문제적 인물로 해석하고 재탄생시키는 서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과거의 일을 생생하게 현재로 펼쳐내는 데에 신화적인 도입부가 큰 역할을 했다. 신화는 문화의 원형, 이야기의 원형이다. 이 원형적인 서사를 들려주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줄도 몰랐던, ‘이제부터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느낌이 저절로 움트는 것이다. 생명수를 구해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염원. 저승의 경계에 있는 듯한 꿈속 세상.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물이 있는 장소. 버려진 아이를 바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 <언덕의 바리>에 나오는 ‘바리데기 신화’의 낯익은 요소들이 독립운동가 경신의 일생과 염원, 통한, 필사적인 싸움을 시간을 돌려 우리 눈앞에 현재의 일로 펼쳐지게 만들었다. 


신화적 설정을 차용하는 것 외에도, 저마다의 사연이나 가치관을 품은 등장인물들이 이야기 전체를 생생하게 펼쳐지도록 만든 부분이 있었다. 너무나 생생한 고뇌와 깊이 있는 감정들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일까. 등장 인물들은 입체적이다 못해 복잡다단했다. 단호하다가도 불안해지고, 어리석다가도 현명해진다. 


대표적으로 행일의 본처 미옥은 납작한 캐릭터로 소비되기 쉬운 입지에 있지만 그렇게 쓰이지 않았다. 행일과 미옥의 사이에 있는, 이제 사랑이라고 하기도 뭐한 질색함과 집착함이 보여 곧 극 안에서 사라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돈을 줄 테니 살려달라고 흥정하는 친일파 황계익 앞에서 자금 부족 때문에 진심으로 고민하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이라던가, 그런 동료를 만류하는 또다른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은 마음이 괴로울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이렇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극 속의 고민이 아니라 현실의 고민으로 느껴지게 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누군가를 지옥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는 소년 바리의 말은 바리데기 신화를 다시 보게 했다. 불가항력적인 일로 버려진 소녀가 친부모를 받아들이고 저승으로 구약여행을 떠나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게 된 것이다. 바리데기가 어릴 때부터 익히 읽어 문화 코드 정도로 인식하는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니라 생동감 있는 소설 인물 정도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폭력과 압제 아래 이미 죽어간 사람들은 생명수로 살려낼 수 없었지만 언덕을 오르는 경신은 우리 앞에 잠시간 살아났었다. 온몸을 쓰는 배우들의 열연과 독특한 연출, 숙고하게 만드는 대사 한 줄 한 줄 덕분에 나는 ‘사진 한 장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경신의 삶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오래 본 동화책의 빛바랜 삽화 만큼이나 납작하게 느껴졌던 신화 속 바리데기 또한 새롭게, 엄연한 부피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나게 하는 그런 연극이었다. 한동안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삶과 연극 <언덕의 바리> 생각을 많이 할 것 같다.   



*바리데기 함흥본에 대한 참조

-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 11편

 (https://m.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1802072136005) 

-윤준섭 석사학위 논문, 「함흥본 <바리데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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