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없이 궂어지는 날씨는 더욱 쌀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잔뜩 웅크려 붙은 몸을 녹여볼 요량으로 숙소로 돌아온다. 계단을 오르다가 얼핏 무언가를 본 것 같아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빙글빙글 길게 이어진 나선형 계단이 와인오프너의 모양새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달팽이 껍질을 잡아당겨놓은 것 같기도 하다.
열쇠뭉치를 왼쪽으로 돌리자 턱 끼이익 문이 열린다. 오전 내 비어있었기 때문인지 객실 안의 공기가 차갑다. 온도조절기 버튼을 몇 번 꾹꾹 눌러 쏟아내는 온기의 양을 늘린다.
“따뜻한 무언가를 마셔야겠다.”
커피메이커에 페트병에 남아있던 물을 부어 넣고 전원을 올려 연갈색의 말간 액체를 머그잔 가득 내린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온기를 감싸 잡고 객실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창가에 놓인 패브릭소파 위에 몸을 쓰러뜨린다. 오전의 눅눅함이 봄 아지랑이가 증발하듯 스멀스멀 빠져나간다.
살아보면 알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늘어진 시간이란 ‘그냥 편안한 것’에 대한 괜한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눈 겨우 뜬 눈꺼풀 위에 해 돋는 무렵의 하늘빛이 검붉게 어른댄다. 이제야 객실을 채운 이 평온함이 커피의 향기 때문이기보다는 베네치아를 밝혔던 아침의 빛 덕분이란 것을 알게 된다.
“아 맞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베네치아지.”
비록 그것임이 분명한데도 새로운 무엇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다. 커피안개 속에서 갈색의 새로운 베네치아가 어여쁘게 아른거린다.
베네치아, 이곳은 포강을 흘러온 이탈리아의 물줄기가 아드리아바다와 만난 연안의 모래톱과 갯벌에 나무말뚝을 박고 또 박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을 쌓고 또 쌓아서, 사람과 사람이 마을과 마을을 일구어 바람이 흐르는 물길마다 배를 띄우고, 다리와 다리로 서로를 이어서 살아가고 있는 물과 나무와 돌과 바람의 마법에 걸린 바다 위에 지어 올린 성(城)이다.
마법이란 건 본시 이성의 해석에 쉽사리 안겨들려 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베네치아에선 혹시 무언가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조우하게 되더라도 애써 이해하려 하지 말고 마음이 가고 느낌이 오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슴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무엇인가 기분 좋은 달라짐이 일어나고 있다. 그 달라짐이란 게 여행자의 들뜬 감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베네치아에선 왠지 신비롭고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가슴에 스며드는 것만 같다.
몇 해 전 런던 템스강의 강변을 오르내리다 우연히 찾아내었던 카페의 한쪽 벽면에 낙서인 듯 갈겨져있던 문구가 떠오른다.
“Life is too short to have a bad wine.”
그래, 질이 좋지 않은 와인을 마시면서 살아가기에도 짧기만 한 것이 사람의 일생인데 아름답지 않은 눈빛과 표정과 가슴으로 이 베네치아를 돌아다니기엔 여행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짧지 않을까.
향 좋은 와인을 입 안에 머금은 듯, 걸음마다 표정마다 신비로움이 스며들 것만 같은 이곳이, 아드리아바다 귀퉁이에 소담스럽게 박혀있는 낭만의 섬, 사람을 사색하게 만드는 섬 베네치아이다.
시간이란 늘 그렇듯이 이내 흘러가기 마련이다.
커피의 온기와 푹신한 소파의 유혹을 밀쳐내고 다시 객실 밖으로 나선다. 오전 내 종아리를 감쌌던 목 긴 장화의 어색함을 굽 낮은 신발의 익숙함이 대신한다.
높아진 햇살 줄기와 아직 물기 가시지 않은 바람의 조각이 살랑살랑 여행자의 걸음을 재촉한다.
여행의 낭만
첫발 들이기엔 머뭇거리지만
행여 살짝이라도
발끝을 들여놓게 되면
늦은 오후에 빠져버린
지독한 사랑처럼
세월 묵혀 걸어온 어른아이의
철없는 본능이 되어버리는
고집스러운 그것이
여행의 낭만이다
본 글은 <<베네치아, 낭만과 사색으로의 산책>>의 일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