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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전기: 1592년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1

카라바조 전기: 1592년, 밀라노를 떠나 영원의 도시 로마로-Part 1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카라바조(1571–1610)는 21세가 되는 해인 1592년 중반 무렵에 밀라노를 떠나 영원의 도시 로마에 첫 발을 디뎠다.

비록 어린 시절의 8년가량을 카라바조라는 작은 시골 타운에서 살기는 했었지만, 밀라노는 그가 태어난 도시이자 그가 ‘화가 카라바조’ 일 수 있도록 성장시킨 태생적인 고향이었다.


밀라노를 떠나는 카라바조는 알고 있었다.

이제 밀라노와는 영원한 이별이란 것을, 그리고 다시는 밀라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것을.

그리고 굳게 결심했다.

밀라노로 돌아오는 일 따위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실제로도 카라바조의 이후 행적에서는 밀라노와 관련된 아무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의 문을 열고 나온 것도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밀라노의 그 화실에서 도제 생활을 마치고 나서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거점 도시 몇 군데는 다녀 보긴 했지만 로마에 온 것은 이번(1592년)이 처음이다.”


당시 로마는 영원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는 메트로폴리탄이었기에 ‘로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젊은 예술가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이제 카라바조에게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화가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밀라노에도,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카라바조라(지명으로서의 카라바조)는 시골마을에도, 도제 생활을 마치고 난 후 화가로서 성숙할 수 있게 해 준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도시에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이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기만 하고,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지도 벌써 8년이 지났다. 물려받은 유산은 지난 몇 년간 다 써버렸으니 밀라노를 떠나는 카라바조의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반겨줄 이도 없고 돌아갈 곳도 남아있지 않으니 어떤 기약을 남기고 떠나올 형편은 애초부터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거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다. 이제부터는 오직 로마만이 나의 고향이다. 로마는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평생토록 살아가야 하는 삶의 터전이다."

카라바조가 로마로 간 이유에 대해

카라바조가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가게 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버전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카라바조가 밀라노에서 ‘경찰관 폭행’과 같은 수습하기 어려운 심각한 사건에 연루되었고, 그로 인한 체포를 피하기 위해 도피 차원에서 밀라노를 떠나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 버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카라바조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무조건 밀라노를 떠나야만 했고, 내친김에 이왕이면 로마로 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카라바조를 연구하고 그 행적을 쫓고 있는 학자로서는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얘기이다.


카라바조가 로마로 간 것에 대해 ‘자의를 따른 카라바조의 능동적 선택’이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도피’와 ‘어쩔 수 없는’이라는 카라바조라면 왠지 그랬을 것 같다는 카라바조에 대해 일반화되어 있는 수동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내놓아야 할 것 같다.


당시의 로마는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 파리와 같이 세상의 중심이자 예술과 문화의 심장과도 같은 도시였다.

따라서 제 나름의 실력을 가진 예술가라면 누구나 로마의 성공을 꿈꾸었다.

그래야만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명성을 누릴 수 있었고 그 명성은 곧 경제적인 윤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카라바조가 로마로 간 것에 대해 ‘성숙된 실력을 갖춘 예술가로서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도피를 위한 것이었건 성공을 위한 것이었건, 또는 어떤 개인적인 이유가 카라바조에게 있었건 간에, 이후에 있었던 카라바조의 행적과 성향을 고려한다면 카라바조가 당시 로마로 간 것은, 앞의 문장에서 언급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낳은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즉, 당시에 카라바조의 상황이, 밀라노에는 더 이상 정 붙일 만한 사람이나 몸 붙여 지낼 거처가 없었는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고, 그 와중에 어떤 심각한 분쟁에 연루되어 그것을 계기로 평소 꿈에 그리던 로마로 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6세기의 로마 전경_Rome, a view of the Piazza Navona.JPG

1600년대(17세기)의 로마

Rome, a view of the Piazza Navona, 1651/1652(144.9 x 191.5 cm)

이 그림은 17세기 로마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화가 카라바조가 살아간 16세기말과 17세기 초는 예술가라면 누구나가 로마에서의 성공을 꿈꾸었던 시대였다.

로마는 종교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이와 관련되어 피아짜 나보나(Piazza Navona) 광장을 그림 17세기의 작품을 통해 당시 로마가 얼마나 번화한 곳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 바로크 디자인의 쇼케이스: 피아짜 나보나

피아짜 나보나(Piazza Navona)는 로마의 공공 광장이다. 바티칸 강 건너편에 있는 이 광장은 서기 1세기에 지어진 [도미티아누스 경기장](Stadium of Domitian) 자리 위에 세워져 있다. 광장의 형태가 길쭉한 타원형인데 이는 고대 경기장의 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아고네스(agones, 경기(games))를 관람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곳을 [치르쿠스 아고날리스](Circus Agonali, competition arena), 경기장이 있는 원형 광장이라고 불렀다.

17세기에 이르러 이 광장은 바로크 디자인의 쇼케이스(showcase for Baroque design)로 바로크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같은 거장들의 작품으로 광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특히 [산타녜세 인 아고네 성당](the Church of Sant'Agnese in Agone) 앞에 위치한 베르니니의 [네 개 강의 분수](The Fountain Of Four Rivers, 이탈리아어로는 Fontana dei Quattro Fiumi)는 피아짜 나보나의 중심을 이루는 대표적인 조형물이다. */

4개 강의 분수(피아짜 나보나).JPG

피아짜 나보나의 [4개 강의 분수] The Fountain Of Four Rivers(Fontana dei Quattro Fiumi)

1648−1651, Gian Lorenzo Bernini,

centre of Piazza Navona, Rom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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