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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전기: 1592년,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2

카라바조 전기: 1592년, 밀라노를 떠나 영원의 도시 로마로-Part 2


밀라노를 떠난 스물한 살의 카라바조는 로마에서의 성공을 열망하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젊은 예술가'였다.

그래서 카라바조가 로마로 가게 된 것은, 그것이 ‘언제냐’ 하는 단지 시기상의 문제였을 뿐이지, 결국에는 카라바조가 해내야만 하는, 태생적으로 카라바조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심각한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밀라노를 떠나야만 했을 것이라는, 흥미를 돋우기 위한 다소의 덧칠이 있었을 것 같긴 하지만 ‘카라바조라면 왠지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 버전 또한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로마에 남겨져 있는 '카라바조가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직접적으로 연루된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경찰과 법원의 공식적인 기록들과,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도피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도 저지른 각종 기이한 행적들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스물한 살의 카라바조가 밀라노에서 어떤 심각한 폭행 사건을 저질러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도피해야만 했고, 그 결과 로마로 가게 된 것'이라는 버전 또한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라바조라는 위대한 천재 예술가를 단지 폭행 사건에만 연관 지어서, 그 불미스러운 행위로 인해 밀라노를 떠나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로마로 가게 된 것이라는 식으로, 거장 카라바조가 있게 한 그 중요한 행보를 단지 도피로 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를 아끼고 연구하는 학자로서는 밀려드는 아쉬움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떤 것들은 그것의 진위보다는 가십거리에게 솔깃하게 귀가 열리는 법이다.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는 카라바조와 관련된 사건들이 분명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그에게 뭐라고 하든지 간에, 어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를 어떤 가십거리에 가져다 붙이든 간에, 카라바조는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너무 일찍 앞으로 나가버린, 천재 화가이다.

아무리 위대한 화가라고 해도 결코 카라바조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가 있기 전에도, 그가 떠나고 난 후에도, 그와 같은 예술가는 결코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비록 카라바조에 대한 저자의 평가에서 기울어짐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카라바조를 옹호하려는 억척스러운 행위로 비친다고 해도, 그에 대해 기술하는 저자의 텍스트들이, 그를 불가해한 짓만을 저지른 반사회적 인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애써 세상과 화합할 필요가 없었기에 세상 어느 것과도 화합하지 않은 한 사람의 천재 예술가로 바라보려는 의도라고 이해해 주기 바란다.


속인들은 그의 이름 앞에 ‘미친 사람’이라든지 ‘불가해한 기인’,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접두사를 붙이고 싶어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카라바조에 대한 지극히 세상적인 평가이기에. 하지만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세계를 깊이 들여다본 이라면 “결코 그렇지 않다.”라든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라고 변명하려 하거나 “그러지 말라.”라고 막아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긴 해봐야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기에, 카라바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저자 또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카라바조가 로마로 간 이유를 짐작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만한 한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

1900년대 중반에 미국이란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활동하던 재즈 뮤지션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뉴욕에서 연주를 하는 것은 빅애플(Big Apple)에서 연주하는 것이고,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 연주를 하는 것은 잔가지(the branches 또는 the sticks)에서 연주하는 것이다.”

1930년대 뉴욕 52번가 째즈클럽들의 밤풍경.JPG

1930년대의 뉴욕 52번가 재즈 클럽들의 밤풍경


이 말은 뉴욕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재즈 뮤지션으로서 크게 성공했다는 의미이고, 다른 도시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를 '빅애플'과 '잔가지'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 뉴욕을 상징하는 애플(사과) 로고가 여기에서 온 것이라고 하니 생각해 볼수록 재미있는 얘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라바조가 화가로서 활동한 16세기말과 17세기 초(1500년대 말과 1600년대 초기)의 예술가들에게는 '로마에서 성공을 거둬야만 크게 성공한 것이고 다른 도시에서 성공하면 잔가지에서나 성공한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카라바조가 로마로 간 이유는 ‘로마라는 빅애플’에서 화가로서 크게 성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피렌체(Firenze,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와 밀라노, 피사, 베네치아와 같은 다른 이탈리아 거점 도시들의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들을 거론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분명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도시들 또한 찬란한 예술의 도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도시들에는 바티칸(로마 교황청)이라는 막강한 후원자가 없었기에 예술품 관련 시장의 규모가 로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았다.

물론 피렌체의 경우에는 메디치 가문의 강력한 후원이 있어 형편이 낫긴 했지만, 카라바조가 살아가던 시기는 이미 르네상스뿐만이 아니라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전성기 르네상스 또는 후기 르네상스)를 지나, 마니에리즘(Mannerism)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이것 또한 후기에 접어들었던 시대였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카라바조 당대의 예술가들이 가졌을 '영원의 도시 로마를 향한 동경'이 어떠했을지를 알아차리는 데에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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