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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늦가을, 어니스트의 파리를 찾아서

파리의 늦가을, 어니스트의 파리를 찾아서


아직 가을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파리는, 처음 발을 디뎠던 그날처럼, 아무리 종종거리며 돌아다녀도 여전히 멜랑꼴리 하다.

“젠장, 이게 파리인가 보다.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파리의 기억은 어니스트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처럼 어느 초겨울의 저녁 무렵에서 시작되었다.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에 어렵게 찾았던 파리가, 비록 냉랭하기는 했었지만, 가난한 작가 시절의 어니스트의 파리처럼 마냥 좋았다.


가만히 뒤돌아보면 그날 파리의 낙엽은 어니스트의 뒷모습을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아마도 그날 외투 깃을 올려 세우고 걸어가는 어니스트의 발아래에서 생기 잃은 낙엽이 늘어진 할미의 젖가슴 같은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고 있었던 것 같다.


여느 해의 이맘때처럼 추적추적하고 을씨년스러워서, 심술궂고 고약하게만 느껴지는 파리의 겨울이 다시 어김없이 찾아왔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파리의 저녁은 겨우 몇 걸음 딛는 동안에 금세 어두워진다.


싸구려 술집의 알코올에 비틀거리는, 어쩌면 헛디뎠던 삶의 걸음을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초로의 남정네 같은 진회색의 바람이 금세라도 불쑥 들이닥칠 것만 같은,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을 꼭꼭 걸어 닫아야만 하는 파리의 겨울이 바로 창밖까지 다가왔다.


밤이 깊어가면 마지막 가을은 어둠 너머로 사라져 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헤르만 헷세가 말한 것처럼 어둠은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가만히 떼어 놓는 것이기에.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샹젤리제의 보도 한가운데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에뚜와 광장에서 불어 내려온 바람이 줄 맞춰 늘어선 가로수들의 겉옷을 벗겨내고 있었고, 보도에 떨어진 나뭇잎들의 서걱거림은 저녁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듯 사람들의 발걸음 속으로 묻히고 있었다.


속살까지 파고든 밤의 냉기에도 애써 걸음을 재촉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파리에서는 시간이 이상하게 흐른다.

파리의 시간은, 그것이 비록 잠시일 뿐이라고 해도, 자꾸 무언가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기미조차 가물가물한 것을 더듬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의 헛된 손짓일 뿐이지."


샹젤리제_늦은_밤_풍경.jpg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허공을 휘젓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이게 파리인가 보다.

괜히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제법 한참을 걷고 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이미 도착했어야 할 숙소가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에뚜와 광장 근처였는데 숨바꼭질을 하자는 듯 종적을 감추었다.


검은 어둠이 네모난 건물들이며 지나는 이들을 검뿌연 실루엣에 가두었기 때문인가 보다.

괜찮다.

파리의 밤거리를 좀 더 걸으면 되니깐.

시간을 둘러 가는 길이 파리에선 낯설지 않다.


얼마나 걸었을까.

걸음을 멈춘다.

파리에선 멈춰 서는 곳마다 쉴만한 물가를 만나게 된다.


저기 좁은 골목 안 구석에서 취기 오른 남정네들의 허허한 기운이 불그레하게 번져 오르고 있다.

오래된 카페들이 구석구석 박혀있는 골목 모퉁이는 술꾼들의 지저분한 허풍으로 왁자지껄 붐비고 있다.

문득 숨이 차오른다.

"파리의 어둠에 갇히면, 술에 취하지 않아도, 담배를 빨아대지 않아도, 호흡이 가빠질 수가 있지."


지난 어느 날의 내가 어느 젊은 날의 어니스트와, 깊어가는 초겨울 밤의 파리의 뒷골목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닌다.

이 술집 저 술집의 낡아 빠진 문을 성지순례에 나선 순례자들처럼 진지하게 눈을 반짝이며 밀어젖힌다.

채 한 블록이 떨어지지 않은 샹젤리제에서는 사람보다 더 느리게 굴러가는 자동차들이 싸구려 담배연기보다 독한 배기가스를 거나하게 토해내고 있다.

숙소가 어디인지는 이제 와서 중요치 않다.

파리의 밤이 이미 깊었으니깐.


파리의골목_늦은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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