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모를 파리의 날씨는 맑고 쌀쌀하다.
어느 날에는 그렇고 어느 날에는 그렇지 않다.
누구에겐간 그렇고 누구에겐간 그렇지 않듯이.
날씨가 맑다는 것은, 철들지 못한 채 기울어 버린 인생의 저녁에 내린 갑작스러운 어둠처럼 차갑고 검고 슬프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우울하긴 하지만 감미로울 수도 있다는, 이상한 얘기이기도 하다.
감성적인 얘기는 원래 이상하기 마련이지만 이맘때의 파리의 하늘에는 이상한 것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은, 이상한 시공간이 흘러간다.
젊은 날에 저지른 기이한 짓들이 문득이나마 떠오를 때면 샹젤리제에 뿌려지고 있는 저녁 불빛보다 더 붉은 신열에 시달리게 된다.
그럴 때면 그것들은 그때의 어리석음이 지어낸 의미 잃은 우화(愚話) 일뿐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애써 지어낸 위안의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리고 잔뜩 몸을 웅크린다.
'벌써' 하는 사이 그것들은 서쪽으로 사라져 간 어느 날의 노을 같은 아련한 얘기들이 되었다.
그것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시간들은, 가로등 아래를 떠나지 못하는 벌거벗은 겨울 나그네의 뒷모습처럼 싸늘해서 아름답다.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 겨울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이어 붙일 뒷 말을 찾을 수 없는 자기 역설일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말을 바꾸어 본다.
영혼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겨울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래서 영혼이 가난한 사람만이 가을에도 겨울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이맘때 파리의 밤은 무척 아름답긴 하지만 영혼마저 얼려버리려는 듯 몹시 차갑다.
나지막한 노랫가락을 따라 후드득 낙엽비가 내린다.
지나는 이가 물어 온다.
“이방인이여 너는 좋으냐, 파리의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파리의 이방인이 된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조금 더 걸어 센강의 낙엽을 밟아야겠다.
센강을 부유하고 있는 불빛은 수면을 쓸어 가는 바람처럼 아무리 쳐다보아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파리의 불빛은 분수대에서 흩뿌려지는 물줄기의 파편처럼 금세 노랗고 하얀 물방울이 되어 어른어른 허공에 산란된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구입한 책 한 권을 손에 잡고 밤의 벤치에 앉는다.
째깍째깍 시간의 토막이 불빛의 깜빡임처럼 흘러간다.
20세기 초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 서점은 1919년 Sylvia Beach가 파리 8 Rue Dupuytren에 설립했다. 사진 속의 숙녀가 Sylvia Beach이다.)
저기에서 취기 잔뜩 오른 한 사내가 다가온다.
낯이 익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만나본 적이 있는 그인 듯하다.
“그도 나처럼 아직 파리를 떠나지 못했구나.”
그도 나도 파리는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음이 떠나지 않으니 파리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종이와 펜을 꺼내 든다.
기사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얘기가, 어니스트가 갈기는 문자로 남겨진다.
“다행이다. 이 좋은 시절을 배고픈 그와 함께 파리에 머물고 있으니.”
그의 파리에는,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제임스 조이스, 음악가 콜 포터,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와 로트렉과 고갱과 드가, 그리고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비평가인 거트루트 스타인이 함께 머물고 있으니, 내일 아침에도 해는 또다시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 이 날을 돌아보며 얘기하게 될 것 같다.
“좋았던 시절의 파리는 배가 고팠던 그에게도, 이유 없이 허기졌던 나에게도, 마음껏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Belle Époque))이었어.”
/* 벨 에포크(belle époque, The 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 또는 좋은 시절):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에 걸쳐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으로 풍요와 평화를 누린 파리를 회고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다. 이 시기 파리에는 문화와 예술이 번창하였고 거리에는 멋진 복장의 신사와 아름다운 의상의 숙녀가 넘쳐났다. 물랭루주와 맥심과 같은 화려한 유흥장들이 생겨나고 세계 각국에서 많은 문화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시기적으로 벨 에포크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끝무렵과 에드워드 시대와 겹치며, 독일의 빌헬름 시대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시대이다. 하지만 프랑스 이외의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이 무렵에 대해 애정을 담아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술 한 잔 하자고 조르듯 청한다.
살다 보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를 때가 있다.
우리는 이십 세기 초반의 카페 되 마고로 걸어 들어간다.
왁자지껄한 실내는 담배연기로 가득하다.
20세기 초의 카페 되 마고(Café des Deux Magots 또는 르 되 마고(Les Deux Magots))
술을 마시는 이며 커피를 마시는 이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문자를 좁은 실내에 뿜어내고 있다.
허공을 부유하던 문자는 종이의 표면에 붙기도 하고 캔버스의 올에 스며들기도 한다.
"배가 고파도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큰 소리로 떠들어댈 수 있다면, 결코 예술의 혼을 잃어버릴 일이 없는 것처럼 마음껏 살아가지 못하게 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빵가게 앞을 지난다.
파리에선 밤이 늦어져도, 이른 새벽에 그런 것처럼, 빵가게를 지나지 않고서는 길을 지나다닐 수 없다.
빵가게 앞을 지날 때면 분명 저녁을 먹었지만, 그와 마신 술로 취기 잔뜩 올랐지만, 허기가 불쑥 치밀어 오른다.
카페 되마고에서 담배를 피우며 어니스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파리의 빵가게에는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가득하고 거리로 난 테라스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곳곳에서 먹을 것이 눈에 보이는 곳이 파리이기에, 파리에서는 충분히 먹지 못한다면 몹시 허기가 진다.”
사실 파리에서의 배고픔은, 배가 고픈 것인지, 그림이 고픈 것인지, 글이 고픈 것인지, 음악이 고픈 것인지, 웃음이 고픈 것인지, 눈물이 고픈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끼익 문손잡이를 밀어 빵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신선한 버터향이 알코올 기운을 깨운다.
큼직한 크로와상과 에스프레소 커피를 손에 쥐고 골목길에 붙어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파리에선 해장을 위해 뜨끈한 국밥집을 찾지 않아도 된다.
가로등 불빛이 커피 크레마에 인퓨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