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자의 변화를 통해 본 카라바조의 로마 시절:
카라바조의 로마 시절은 ‘사제 판돌포 푸치를 만남 → 몇몇 화실에서 지냄(이 기간에 로렌초 시칠리아노 화실에서 마리오 민니티를 만남) → 화가 체사리 화실에서 일함 → 추기경 델 몬테의 후원을 받음 → 교황청의 작품 의뢰를 받음’과 같이 주요 후원자(조력자)의 변화를 중심으로 구분 지어 살펴볼 수 있다. */
사제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물면서 오직 그가 요구하는 그림만을 그려야 하는 카라바조는, 한낱 푼돈에 재주를 팔아서 먹을 것과 머물 곳을 해결하는 보잘것없는 그림쟁이로 전락한 것 같다는 비참함을 느꼈다.
스물 하나는, 한창 꿈을 꿀 나이이지 그런 생활에서 만족감을 찾으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이다.
예술가로서 아무런 성취감을 가질 수 없는 생활이 하루하루 계속될수록 카라바조는 점점 무기력해져 갔다.
두 발과 양손에 족쇄가 채워진 것만 같은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서 커다란 결단이 요구되는 때였다.
결국 1593년 판돌포 푸치의 집을 뛰쳐나와 로마의 몇몇 화실들을 전전하는, 불안정하지만 자유로운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기간에 카라바조가 거쳐 간 화실들 중에는 마리오 민니티(Mario Minniti, 1577–1640)를 만난 로렌초 시칠리아노(Lorenzo Siciliano) 화실이 포함되어 있다.
두 사람이 만날 당시 카라바조의 나이는 23살이었고 마리오 민니티의 나이는 16살이었다.
마리오 민니티의 나이가 카라바조보다 6살 어리기는 했지만 카라바조의 평생의 친구이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영혼의 친구가 되었다.
그 시절의 카라바조와 마리오 민니티는. 기성 화가의 화실에서 지내는 여러 무명 화가들 중에 두 사람에 불과하였기에 ‘화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화실이 요구하는 그림이란 게 결국에는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그림인 ‘캐비닛 그림’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라바조와 마리오 민니티는 그들 앞에 놓여 있는 현실에서의 여건보다 더 크고 이상적인 것을 열망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그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두 사람이 꿈꾸었던 것은,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예술가로서 완벽한 독립을 이루어서 궁극적으로는 거장이라는 명성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마리오 민니티(Mario Minniti, 1577–1640)가 모델인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Boy with a Basket of Fruit>, c.1593, 70cm×67cm, Galleria Borghese, Rome
마리오 민니티의 <다섯 가지의 성스러운 신호>(The Five Signs)
Agira (Enna), Sicily – Church of Sant'Antonio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어둠과 빛의 적극적인 대비는 의심할 바 없이 마리오 민티니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마리오 민니티는 카라바조가 1593에 그린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Boy with a Basket of Fruit)의 모델이며 1606년 이후에는 자신의 고향인 시칠리아(Sicily)에서 지역화가로 활동한 바로크 화가이다.
마리오 민니티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 또한 당시의 다른 화가들처럼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카라바조가 자신에게 내려진 참수형을 피해 로마를 떠나 도피생활을 하고 있을 때 시칠리아의 마리오 민니티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로마의 몇몇 화실들을 옮겨 다닌 카라바조와 마리오 민니티는 무명 화가들에게 제한적인 로마의 예술 환경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졌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찾아온 로마에서, 예술적인 독립을 위한 무명 화가들의 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라는 화려하고 거대한 벽'에 부딪혀 좌절해야만 했다.
아름답고 향기가 강한 꽃에는 더 많은 나비와 벌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꽃이 화려하면 할수록 나비와 벌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것처럼, 영원의 도시 로마는, 비록 모든 예술가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는 있었지만, 그 문은 이미 성공을 거둔 기성 예술가들과, 지극히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오직 극소수의 신규 예술가들에게만 열려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 문은 나에게만 닫혀있다고 느꼈을 수 있다.
이 점에서 당시의 환경은, 카프카의 단편 소설 <법 앞에서>에서, 시골에서 온 한 사내(촌부)를 막아선 ‘법의 문’과 다를 바 없었다.
카라바조는,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PP. VIII, 1592-1605)가 가장 총애한 화가인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 1568-1640)의 공장과도 같은 작업장(화실)에서 꽃과 과일을 주제로 한 정물화를 그리는 일을 맡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카라바조가 주세페 체사리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 것을 1593년에서 1594년 사이라고 보고 있다.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즉위한 해는 1592년이다. 따라서 그다음 해인 1593년 경부터 주세페 체사리 화실은 황금기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카라바조가 체사리 형제와 어울려 지내면서 로마의 뒷골목에서 패싸움을 벌리기도 하였다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체사리 형제와 관련이 있는 모종의 사건 이후에 주세페 체사리의 화실과 인연을 끊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그 사건이 어땠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게 된다.
카라바조의 폭력적인 행동은 결코 단독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손바닥 두 개를 마주쳐야 소리를 만드는 것처럼 카라바조가 저지른 기행에는 항상 그에 준하는 기행을 함께 일으킨 대상이 배경에 있었다.
주세페 체사리의 화실에서 일하던 기간에는 체사리 형제가 그 비경에 있었고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도 카라바조 못지않게, 아니 카라바조보다 더 폭력적인 행위에 연루되었던 라누치오 토마소니(Ranuccio Tomassoni)라는 인물이 있었다.
물론 그런 대상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기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카라바조는, 천재 화가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기행을 저질렀다.
예술사에 있어 그런 인물은 카라바조 전에도 카라바조 후에도 없었다. 오직 카라바조만이 그랬기에 폭력성이든가 기행은 천재 화가라는 것과 함께 카라바조를 나타내는 아이덴티티가 된 것이다.
후기 매너리즘 화가인 주세페 체사리의 <자화상>
<Self-portrait of Giuseppe Cesari>, 1640, Accademia di San Lu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