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주를 보면, 바람 같다. 잠잠하다 싶다가도
갑자기 문을 쾅 닫고 지나가는 바람. 내 마음의
물 잔을 잔잔히 흔들다, 한순간에 넘치게 하는 바람.
다섯 살이 된 아이는 이제 세상의 중심이 자신임을 아는 듯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느끼는 것’을 제법 정확하게 알고,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 표현은 때때로 소리로, 눈물로,
주먹 쥔 손끝으로 나온다.
“아빠 미워!”
“그러지 마!”
“아빠 가!”
그 말들은 마치 번개 같아서, 순간적으로 가슴을
탁 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금세 찾아오는 맑은
웃음은, 그 모든 구름을 걷어내는 햇살이기도 하다.
처음엔 그런 우주가 귀엽기만 했다.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말대꾸를 하고,
눈을 부릅뜨던 얼굴도 그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깥세상에서의 우주는
조금 낯설다.
조부모님 앞에서는 더 감정의 바람이 거세다.
그 앞에서는 야단치지 않는 게 우리 집의 작고
조용한 약속인데, 식당이나 거리 한복판에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 때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도 버겁다.
한쪽에선 우주를 달래고, 다른 쪽에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아이 하나를 온전히 품는 일이,
이토록 복잡한 균형의 춤일 줄이야.
아내도 나도,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김없이 ‘그래도 이 아이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다섯 살 아이들은 다 그래. 잘 어르고, 잘 달래고, 다정하게 품으면 돼.”
그 말이 요즘 따라 자주 마음에 남는다.
사실 힘들지 않다. 우주를 키우는 일이 나에게는
노동이 아니라, 발견이다.
아이 안에 감춰진 계절을 하나하나 꺼내 보는 기쁨.
오늘 아침, 우주는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장염이 막 나았으니, 그래, 하루쯤은 같이
있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선생님께 가정보육 문자를 보내고,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 전 어린이날 선물로 준비해 뒀던 아이용 카메라를 처음 꺼내 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 우주는
본격적인 ‘첫 촬영’을 시작했다. 나무를 찍고, 꽃을
찍고, 고양이를 찍고, 아빠도 찍고 본인도 찍었다.
세상을 ‘찍는다’는 일의 기쁨을 아이가 알아버린
것이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확인하며
“내가 잘 찍었지?” 하고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 순간, 아이는 세상의 기록자였고,
나는 그 세계에 속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
기꺼이 그 속에 담기고 싶었다.
오랜만에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웠다.
몸을 담그고 있는 아이는 금세 고요해졌다.
물결 사이로 얼굴이 피어오를 때, 세상 가장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우주가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
우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한다는 것,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돌아가고
싶어질 시간이란 걸.
다섯 살의 우주는 아직 작다.
하지만 작은 몸 안에 거센 파도와 햇살, 바람과 고요, 사랑과 성장이 가득하다.
나는 오늘도 그 아이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 계절의 이름을 ‘우주’라고 조용히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