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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웨이 프롬 더 하드코어, 비욘드 더 포스트 (3)

Unwound / Leaves Turn Inside You (完)

by 감상주의

| 거대한 혼돈 속에, 본질의 존재와 기능은 과연

When Lost In Cuba


"진정 무엇이 하드코어를 정의해왔는지에 대해 잊어버림과 거의 동시에, 이제는 무엇이 '포스트'를 정의하는지조차 희미해지는 시점에 이르렀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Leaves Turn Inside You에서 하드코어와 안티-하드코어 중 어느 한쪽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작품은 여전히 하드코어와 연관돼 있다. 다만 본질로 삼던 것들과 그로부터 벗어난 방법론들이 서로를 무분별하게 겹치고 가리기 바쁠 뿐이다. 그러나 언와운드의 혁신이 본질을 소멸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이를 카오스 속에 던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많은 것을 왜곡하고 반전시키는 카오스는, 가령 팽팽하던 질주를 느슨한 평형으로 둔갑시켜 본래의 '텐션'에 대해 아리송하게 만든다. 혹은 잔뜩 찌푸린 미간과 목에 뻣뻣하게 선 핏대만으로 가늠했던 어그레션 몽롱한 읊조림으로 인해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열기를 동력으로 삼아왔던 분노 대신, 이입의 여지를 일절 주지 않고 허무라는 황폐한 안개만을 흩뿌린다.


비록 이러한 각종 트릭이 분노의 역할을 방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관찰을 방해하는 것이라곤 할 수 있을 테다. 혼란이 우리 정신에도 침투해 목소리를 높일 힘을 제공하긴커녕 넋을 앗아가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무심코 방심하고 있을 때 아직 여정이 끝나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라며, 갑작스러운 퍼커션 연쇄폭탄을 우수수 터뜨린다.


어느덧 2부에 들어설 시간이다.



| "One Lick Less": 부재 속에서 설 힘을 잃을 때


1부가 안티-하드코어로 침투하는 여정을 그리는 챕터였다면, 2부는 완전한 침잠 속에서 우리의 자리와 방향을 묻는 챕터라고 하겠다.


우리는 수면 위로 헤엄쳐 오르긴커녕 심연 속에 제대로 서 있을 에너지조차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이곳에는 번뜩이는 천재의 자신감도,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혁신가의 야심도, 세상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젊은이의 패기도 없다."


그저 지친 망령들의 불안만이 남아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예술가들에게 투어는 더 이상 꿈과 명예의 실크로드가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챗바퀴이자 목적 없는 방랑일 뿐이다.




그들이 털썩 주저앉은 채 느끼고 있는 것은 일종의 부재다. 곡 제목을 "본질을 속 지탱할 기타의 릭(lick) 한 줌이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릭이란 말인가. 참 많은 것이 빠져나간 것처럼 들린다. 템포, 어그레션, 퍼포먼스, 포스, 분노, 희망, 확신 등이 모두 멀리 증발해 버린 것처럼.


에너지가 완전히 소실된 록은 흡사 어떠한 질감조차 느낄 수 없는 앰비언트처럼 되고 말았다. 시체 같은 감각은 곧 관습을 지키며 균형을 유지할만한 굳건함도, 역으로 안정을 거부하며 탈관습적인 혁명을 일으킬만한 아이디어도 떠올릴 수 없음을 일깨운다.


딜레마에 갇혀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 "Scarlette": 소멸이 아닌 혼재함으로써의 혼돈

Scarlette MV (made by Zak Margolis) / Numero Group

안티를 향해 기어이 심연으로 침잠한 끝에, 스스로 망령을 자처한 채 주저앉도록 한 세계. 그곳에서 그가 느낀 것은 부재라고 하였다. 본질의 존속이나 혁명 중 어느 것이라도 이행할 만한 에너지의 부재 말이다.


헤비한 베이스와 더불어 앨범 통틀어 유일하게 우리가 알던 격양된 저스틴의 보컬--물론 훨씬 쉰 듯한 목소리로--이 담겨 있는 'Scarlette'은 언뜻 위의 판단을 곧바로 반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3) 편 첫 단락에서 이미 본작이 여전히 하드코어에 '관해' 있으며, 본질의 소멸을 위한 모험이 아니라고 저술한 바 있다. 그러나 본 트랙으로 하여금 그들이 하드코어를 지켜내고 있거나, 자리를 되찾았다는 뜻으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전술했다시피 그들이 자초한 카오스는 '하드코어인 것'과 '하드코어가 아닌 것' 중 어느 한쪽이 우위를 독점함으로써, 혹은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닌, 양 쪽이 마구 교차함으로써 발생한다고 하였다. 즉 'Scarlette'의 격앙은 곧 혼재로 인한 혼돈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라고 봐야 한다.


반면 'Scarlette'이 초래한 혼돈은 심연을 정의하던 '안티'라는 성질에도 인지부조화를 야기한다. 외연뿐일지라도 본 트랙을 '하드코어인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하드코어에 반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야 성립하는 안티 영역의 조건을 위반하는 모순이 생기는 꼴이지 않은가.


고로 유감스럽게도 1막에서 여정의 목적으로서 합의했던 '안티-하드코어'라는 전건은 부정됐다. 정확히는 이렇게 증언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드코어에 있다고도, 안티-하드코어에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카오스다.



| "October All Over" ~ "Summer Freeze": 딜레마와 매너리즘이 남긴 것은 니힐리즘적 결(結)인가

Genius

비록 소멸이 아닌 혼재로서의 혼돈일지라도 본질이 허무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할 에너지가 부재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컨대 여전히 하드코어임에도 더 이상 하드코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를 말이다.


그것은 혼란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과 관련돼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안티와 포스트, 하드코어와 안티-하드코어가 서로 미친 듯이 부조화를 일으키는 곳에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 상태라고 판단해야 맞는지, 본질을 따르는 것과 앞서는 것 중 무엇을 해야 하는지, 되돌아가기로 한들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닌지 등.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딜레마. 그것도 우리의 본래 계획--언와운드의 수년간의 준비와 모험--을 무너뜨리고 정신을 매몰시키는 매너리즘으로서의 딜레마다.




대다수의 혁신가는 극복 및 회생을 이루어낼 방도를 찾지 못해 왔다. 모든 청중에게 그들이 이미 펑크와 전혀 관련 없는 장르를 하고 있거나, 심지어 실망스러운 무언가로 대신하고 있거나, 자취를 감추거나,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2부는 언와운드조차, 그리고 씬 전체에 예외 없이 들이닥친 딜레마와 매너리즘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혜안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대부분 문화적 니힐리즘이라는 운명에 종착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미처 걱정을 할 새가 없었던 달은 더 이상 올 새 없이 완전히 종결 돼버렸으며('October All Over'), 땀이 마를 새 없이 뜨거웠던 여름은 기약 없는 동결을 맞이함으로 인해 찾아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Summer Freeze)."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본질을 지킬 당위를 찾지 않기로 했으며, 이에 따라 과격하게 연주하거나 핏대를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 혹은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펑크, 극단적인 말로는 DIY를 위해서일 필요가 없어졌다. 예컨대 이대로 사이키델리아가 돼버리든, 포스트 록이 돼버리든, 얼터너티브 록이 돼버리든, 스탠더드 팝이 돼버리든 더는 알 바 아닌 셈이 된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돼버렸단 말인가.



| "Radio Gra": 배회와 폐사의 기운으로부터 다음의 단계는

Radio Gra M/V (made by Slater Bradley) /Numero Group


그렇게 망령이 된 씬의 모두가 고립과 회의 속에 매몰된 채 배회하게 된 곳은 기타 또한 침울함을 가득 안고 배회하게 된 곳이다. 악기들도 자신들의 생사기로에 놓여 있음을 그들끼리 안다. 이미 이곳은 모든 것이 카오스로부터 거의 패배하여, 수면 위의 누구도 봐주지 않은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곳이다.


여름이 멈춰 버린 서늘한 곳에 70년대 폴란드 극의 어느 대화 장면을 녹음한 테이프가 재생된다. 그것은 언젠가 나와 그녀와 당신이 듣고 있던 라디오다. 그러나 이제는 '듣고 있었던 라디오'가 돼버렸다. 아마도 유물이 되고 만 것이며 음악과 음성은 곧 망각 속에 꺼내지 못하도록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려했던, 점차 기정사실로 여기게 된 죽음의 형태다.




처음 우리를 모험으로 인도했던 멜로트론이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훨씬 비정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연출하는 구슬픈 현악은 우리가 집단 폐사한 송장임을 확정하며 무심하게 장송하는 사신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슬레이터 브래들리가 감독한 비디오에는 폐사당한 고래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철저하게 폐쇄된 이곳에서는 대신 사체를 꺼내줄 사람들조차 없을 것이므로 더욱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본 인스트루멘탈 트랙에서 목소리마저 아예 거둔 선택은 우리가 회생조차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죽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처지에서 다음으로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번민해 보도록 하기 위한 양보라고 믿으려 한다. 앞서 2부가 우리의 자리와 방향을 묻는('깨닫고 절감하는'이 아닌) 챕터라고 주장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자, 고뇌를 위한 시간이 다가왔다.



| "Below the Salt": 진실과 가치를 되묻도록 하는 밑바닥


밴드는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10분에 달하는 포스트록 구조를 다시 끌고 왔다. 1부의 'Terminus'에서가 이탈과 진입의 과정을 유기적으로 그리기 위한 구조였다면, 'Below the Salt'는 지금까지 다방면으로 펼친 경험과 복선들을 회수하기 위해 마련한 별도의 공간이다. 비록 현재 우리는 심연에 있지만 이곳에선 마치 긴 시간에 걸쳐 점차 너울이 강하게 굽이치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모습을 상상케 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난 이야기와 상념들을 모두 끌어모아 깊은 숙고를 가져야 한다. (2) 장에서 끝맺었던 말을 그대로 잇자면, 그 인고의 과정이 그럴듯한 대안이나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우선 당장의 니힐리즘과 매너리즘에 대하여 되짚어 봐야겠다. 포스트의 극단, 혹은 안티를 향해 가고자 했던 하행은 정작 어느 쪽인지도 모를 난국에 이르게 돼버렸다. 그간의 고행과 시행착오가 성취를 위해서였건만, 결론은 무의미와 몰락뿐이었다. 우리는 모험을 원했던 것이지 침체를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언와운드뿐만 아니라 포스트-하드코어씬 전체가 탈본질에 도전했던 처음의 이유는 (0) 장의 서문대로 오히려 본질로의 존속을 위해서 불가피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즉, '어웨이 프롬 더 하드코어'는 진정 하드코어를 위한 역설적이면서도 절박한 비전이었다. 마치 동료를 지키기 위해 기어이 동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악을 자처하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또한 초기의 포스트는 엄연히 절충책이었다. 지금 처한 상황이 몰락이 맞다면, 염병할, 어쩌면 포스트-하드코어 밴드들의 패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본래의 목적 하에 적당한 선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망각하며, 이에 반하는 모든 의문과 시도에 감히 눈조차 들이지 않았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애초부터 구태여 선을 넘으려 하지만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닐까.




본래의 목적에 따른 혁신과 분노에 관해선 어떠할까. 개혁을 위하지 않은 혁신과 계몽을 위하지 않은 분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저 우상들의 가르침이나 레거시를 따라 하며, DIY 정신에 입각해서라느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느니, 그럴듯한 슬로건을 착실하게 내걸고, 엇비슷하게 가사를 쓰며,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였던 젊은이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천재로서의 갈망, 씬에서의 명예, 질서에 대한 권태, 혹은 그저 일탈을 향한 호기심 등, 본질의 수호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던 게 바로 그들의 잘못이라면? 혁신가가 되고픈 마음에 의한 혁신은 그 자체로 오만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토록 대책 없이 어두컴컴한 지금의 광경이 바로 본질을 망각하고 질서를 벗어나려 했던 자들에 의한 말로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야 한다면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절망하느냐고, 모두 당신들의 자업자득 아니냐고 따진다고 한들 우리 모두 할 말이 없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러한 의심에 대해선 심지어 언와운드조차도 결백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마냥 질책하기엔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물론 분노의 목적이 근본주의자들의 것과 같다는 주장이 그들 입에서 나온다면 이를 작정하고 변명으로 치부해 버릴 만큼 냉혹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분노의 참된 가치를 부정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는다. 같은 의미로 그들의 음악에 분노가 다른 의도로 실천됐을 수는 있어도, "분노를 실천하지 않았다", 혹은 "분노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귀결하는 것은 더더욱 진실과 무관하다. 어떤 의도나 방식으로든지 그들은 분노를 원본으로 삼았고, 표출을 하려 했으며, 어쨌든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분노를 계속 지키려 해 왔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분노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분노"라는 문구를 명시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불완전한 형태일지라도, 만에 하나 합당하다고 여길 만한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사소한 부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혁신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의 생각이 그랬을 뿐, 실제로 카오스에게 패배한 것이 아님'을 재고해 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져본다. '악랄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을 뿐 어떤 답도 평생 찾지 못할 블랙홀에 이른 것이 아님'을, '허무라고 여기고 있었을 뿐 정말로 어느 하나 남지 않은 것이 아님'을 재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가라앉게 된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던 분노에서 벗어났을 뿐 분노가 없어진 것이 아님'을! 기어코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가 가장 중요한 지점일 테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형태라며 이미 보험을 들어놓았다. 나 역시 그 이유를 확정적인 종류의 것으로 내세워 버리는 순간 오류와 모순의 여지가 너무나도 많고, 20년 전의 작품에서 도출해 낸 것이 오늘날의 하드코어 씬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도 앞선다. 그러므로 이는 일종의 베팅이라고 여겨주길 바란다. 그럼에도 주장을 당장이라도 철회하지 않고 이어가려는 짓거리는, 특히 마지막에 재고가 아닌 증명이라고 한 것에 대한 당위는 그 베팅이 '시대를 막론하고 유의미하다'라는 것에 확신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실존'으로서의 분노에 모든 칩을 걸고자 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을 여기에서 꺼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나조차 다소 바보 같고 수치스럽다. 그러나 여기서만큼은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 게 맞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질서에 벗어난 존재에 대해 '존재가 여전히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물론, 그렇고 말고"라고 기꺼이 응하겠다. 원칙에 어긋난 분노에도 가치가 존재하고, 심지어 멈춘 적 없이 기능하고 있음으로써 우리의 살아있음을, 우리가 하드코어에 있음을, 하드코어가 있음을 긍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불안정한 너울은 우리의 방향을 다르게 만들 뿐, 흔적을 없애긴커녕 익사조차 시키지 못한다.


두 차례의 포스트록과 러닝타임 내내 저스틴의 목소리를 감싸고 있던 사이키델리아 안에서도 분노는 엄연히 기능해 왔으며, 그렇기에 'Off This Century'와 'Scarlette'으로 말미암은 질서대로의 분노도 사이사이에 섞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존재를 완전히 잃어버릴까 봐 이탈에 대한 집념을 번복한 것도, 마지못해 발악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그들이 서로의 양립이 위반되는 관계가 아니며, 공통분모 하에 포함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함께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질서 안에 있던 분노와, 질서 바깥에 있게 된 분노라는 차이일 뿐.


이는 본질에 의거한 하드코어로서의 존속 대신 하드코어 자체로서의 존속을 인정함으로써 그간 문화의 완전한 죽음에 대한 근심과 무기력을 해소하고, '실질적인' 문화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긍정을 도모하는 대안처럼 느껴진다. 앞서 한 코멘트를 똑같이 반복하건대, 적어도 유의미한 힌트--내지는 새롭고 중요한 논제--는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희망한다.


여기까지가 위태로운 너울이자 드넓은 늪이기도 한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10분 동안 처절하게 치러낸 내 고뇌의 전부다.

기타가 점차 강해지며 내 확신은 점차 더 큰 확신이자 열정이 돼감을 느낀다.



| "Who Cares": 벗어난 곳으로부터, 여정을 마친 뒤의 넘어선 세계에 여전히

9863f80c.jpg Pirchfork

물론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으며, 전혀 문제를 겪고 있던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아무런 깨달은 바가 없었다면 언와운드의 실험은 무가치로 전락했을 것이며, 혁신에만 매몰된 문화인 채였다면 정말로 파멸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확실한 답을 알고 있다고도 못할 것이며, 어쩌면 존재론에 의존해서라도 죽음의 위기로부터 발버둥 치고 싶던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씬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음지의 어딘가에 여전히 기타를 휘두르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있는 이들이 있다. 핏대를 세우지 않더라도 정형화되지 않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순수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이 있다. 앞으로의 사례들을 반례랍시고 열거하는 것이 논지에 벗어난 비약일런지 모르겠지만, 만약 어그레션과 분노와 DIY와 하드코어가 그때에 죽고 사라진 것이 확실하다면 이후 20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그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포스트와 탈본질이 문화의 모든 것을 망쳤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입에 밴드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소위 말하는 '근본도 잊은 채 갈 때까지 간 밴드'가 뿌리 깊은 언더그라운드의 바운더리 내에서 기어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아직 그들의 시도와 시행착오로서의 대안적 성취, 그로 하여금 여전히 존재하는 생동의 증명에 긍정하며, 어쩌면 그것은 '포스트' 마저 넘어선 차원의 무엇인가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라는 결론을 피력하려는 순간, 익숙한 터널음이 들리기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적인 드론 대신 시간을 역주행하는 듯한 거친 노이즈 속에서 몸이 이끌린다.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모든 여정을 마쳤구나.

그들이 우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고 있구나.


처음에 들려줬던 연주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긴 시간 고생 많았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고, 가시는 길 무탈하게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여운인지 허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솔직히 잠깐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꾼 것처럼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지만, 어쨌든 별 희한한 경험을 한 뒤 평소와 같은 여기에 있다.


여정을 성황리에 마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불확신이 남긴 하지만,

뭐,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어느 순간 고전 영화에 한 번쯤 들었을 법한, 꿈속에서 원래 들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한 음악이 경쾌하게 들린다. 희미하게라도 들리는 것 보니 망각 속에 파묻힌 유물은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면 그들이, 혹은 내가 어째서 그 소리 하나만을 남기게 됐을까.


뭐가 어쨌든 그것은 사라지지도, 잊히지도 않고 여전히 잘 들리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음악이다.


Leaves Turn Inside You (完)


hq720.jpg?sqp=-oaymwEhCK4FEIIDSFryq4qpAxMIARUAAAAAGAElAADIQj0AgKJD&rs=AOn4CLBFGeDPcX1380ROPkIgpZdC46bGZA The Mellotron: A Keyboard with the Power of an Orchestra (1965) | British Path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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