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의 뜰 2
어머니가 농사일에서 눈을 돌려 장사를 시작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음)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나는 '고령장'에 가야 하니 옆집 아재 따라 학교 댕겨 오거래이."
입학식 날 아침에, 어머니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부리나케 고령장으로 향했다.
그날은 오일장 중에서 고령장이 서는 날이었다.
옆집 아재는, 길천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를 잡았다.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던 초등학교 가는 길에서 3월 바람이 쌩쌩 불었다.
유판마 아랫동네인 구정리 마을을 지나면 장터가 있었다.
찻길을 건너 야성교를 지나면 구장터가 나왔다.
구장터 마을이 끝날 때쯤 우측으로 난 길은 아득히 길었다.
황새골 벌판을 하염없이 걸으면 이윽고 학교가 나왔다.
학교 앞 길 양쪽으로는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마치 내 입학을 축하하는 듯 이파리로 손을 흔들었다.
설레는 맘과 두려운 맘이 범벅이 되어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
나의 왼쪽 가슴에는 가제 손수건이 꽂혀 있었다.
그 위에 '1-2반'이라고 적힌 붉은 리본도 있었다.
그날 나는, 부모 없이 홀로 학교에 내동댕이쳐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이 학교에 와본 적 없다.
부모님은 자녀 교육을 위해 열심히 사셨지만,
학교에 오시거나 자녀를 곰살맞게 챙기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학교 앞 천일네와 기범네에서 잡동사니를 팔았다.
천일네는 학교 교문에서 나오면 오른쪽에 있었다.
기범네는 학교에서 나오다가 약간 걸어가면 왼편에 있었다.
기범네는 살림집 대청마루에 물건들을 진열해 두었다.
게다가 축담을 올라가야 해서 천일네보다 발치가 상그러웠다.
그렇지만 기범네에는 천일네에 없던 복주머니 모양으로 된 사탕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범네로 발길이 갔다.
애들은 그 두 가게에 들러 군것질 거리를 사거나 학용품을 샀다.
씹다가 불면 풍선이 동그랗게 만들어지던 풍선껌은 우리를 설레게 했다.
책 표지나 벽에 붙여놓고 비비면 그림이 박혀 나오는 판박이 껌 포장지도 인기 만점이었다.
껌은 뒷전이고 여러 가지 캐릭터가 나온 껌포장지만 챙기는 녀석도 있었다.
입안에 넣고 꼬르륵꼬르륵 소리를 내는 동그란 고무 꽈리도 있었다.
여러 모양의 풍선을 먼저 골라 사려고 조무래기들은 안달이 났다.
학교가 끝나면 천일네와 기범네는 애들로 가득 차곤 했다.
나는 종종 복주머니 모양으로 된 사탕을 샀다.
할머니께는 그게 영양제라고 말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동생들 몰래 내게 동전을 몇 개 건네주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먹어야지. 니는 그거 먹고 똑똑해지고 키도 커야지."
할머니는 내 말은 뭐든지 믿었다.
어머니는 가마니때기에 고무신 몇 켤레를 놓고 장사를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장터 바닥에 앉았다는 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무슨 여자가, 농사일이나 하지. 장터 바닥에 나간다고? 쯧쯧."
어머니는 2일과 7일이 되면 장터에서 고무신을 팔았다.
오일장은 야로장, 가야장, 묘산장, 고령장, 합천장 등을 로테이션으로 돌았다.
오일장은 특정 날짜의 끝자리 숫자에 맞춰 5일 간격으로 열리는데,
예를 들어 (1일, 6일), (2일, 7일), (3일, 8일), (4일, 9일), (5일, 10일)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됐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을 무싯날이라 했다. 31일은 아무 장터에도 장이 서지 않았다.
농사꾼에서 장사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셨던 아버지는 신문 보급소를 운영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문 보급소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지국장' 혹은 '국장'이라 불렀다.
농사만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김 씨, 박 씨라고 부르던 때에 그 호칭은 뭔가 있어 보였다.
바야흐로 부모님께는 농사는 부업이요, 장터에 나가서 하는 일이 본업이 되었다.
장날이 되면, 장터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디선가 숨은 듯이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장날만 되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장터로 몰려왔다.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장이 서는 날이면, 풀빵 가게(풀빵 기계만 달랑 하나 있을 뿐이었다) 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누런 알루미늄 주전자에 담긴 묽은 반죽을 빵틀에 적당히 부은 후에
팥 앙코를 한 꼬집 넣어 구운 풀빵은 달콤 촉촉했다.
풀빵은 내가 최초로 맛본 간식이다.
"미술 준비하려면 20원이 필요해요."
그렇게 해서 돈이 내 손에 들어오면 남은 돈으로 부모님 몰래 풀빵을 사 먹곤 했다.
10원이면 풀빵을 두 개나 살 수 있었다.
장날엔 부모님 잔심부름을 했다.
어머니는 때때로 잔치 국수 한 사발을 사주셨다.
매촌댁 국수 가게 가마솥에는 멸치 육수가 김을 하얗게 뿜어대며 끓고 있었다.
매촌댁은 사리를 대접에 담고 뜨거운 육수를 끼얹은 후에 양념장을 살짝 얹어 내놓곤 했다.
풋고추와 쪽파 다진 것 위에 참기름을 듬뿍 넣은 양념장은 그 맛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촌댁 국수전에서 맛본 잔치 국수는 내가 처음으로 했던 외식이다.
부모님이 하는 고무신 장사는 날로 번창해 갔다.
점점 운동화, 슬리퍼 등 모든 종류의 신발을 다 갖추어서 파는 신발 가게로 바뀌었다.
더 이상 부모님은 이곳저곳 오일장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시장 안에 판자를 덧대어 만든 신발 가게는 우리 가족사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산 너머에 살던 사람들조차도 줄지어 우리 가게에 와서 온 가족의 신발을 사곤 했다.
명절 대목이 되면 우리는 밤마다 돈을 셌다.
마대자루에 든 종이돈을 꺼내어 세다가 지쳐서 졸기도 했다.
그 고을 천지에 있는 모든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으는 폭이었다.
신발을 신지 않고 살 수 없는 노릇이고
장터에 신발 가게는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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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