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동굴인
'한 마리의 고래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한 줌의 흙이 되었다.'
계절도 시간도 명확하지 않은 그런 날씨였다.
흐린 하늘 사이로 해가 뿌옇게 떠있고
기온이 낮지 않지만 어쩐지 싸늘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어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런 날은 으레 몸이 아파온다.
특별히 어디가 아파서 라기보다는 그냥 몸의 가장 약한 부분
또는 요즘 무리한 부분이 욱씬댄다
오늘은 오른쪽 엄지 손가락 첫째 마디 차례인 것 같다.
무거운 머리와 그것보다 몇 배는 무거운 눈꺼풀을 결국 들지 못하고
간신이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켜 본다.
밤새 나를 증오하는 한 무리의 폭도들이 나에게 집단폭행을 한 것일까?
나는 의식을 잃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겨우 깨어난 것이 분명하다.
무의식에 전해지는 신체의 고통으로 망상을 흩어버리고는
반쯤은 주저 않은 매트리스 밖으로 한쪽 다리만 내려놓는다.
둥지를 떠나야 하는 어린 새의 심정도 이보다 더 참혹하지는 못할 것이다.
낡고 오래되어 교체 시기가 적어도 3년은 훌쩍 넘은 반쯤 꺼진 침대가
왜 이리도 아늑한 것일까? 지금 이 순간만은 클레오파트라의 젖가슴에
파묻히는 것을 택하기보다는 5분만 침대에서 더 누워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악하디 악한 존재에게라도 기꺼이 영혼을 저당 잡힐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고 역도 선수 마냥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그 기세와 관성으로 나머지 한쪽 다리를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이제야 겨우 앉은 자세를 하고는 스스로의 의지와 불굴의 근성의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그 성취감도 잠시뿐 차가운 새벽공기는 밤새 이불속에서 지핀 온기를 한순간에 빼앗아 간다.
내가 원하긴만 하면 다시 따스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나를 온전히 감싸주는
이불속으로 상처 입은 짐승이 동굴 속으로 몸을 숨기듯 춥고 험한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피난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럴만한 의지와 능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이불속으로 돌아가 밥벌이를 하지 못한다면
머지않아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 자명하기에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밤새 회복한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어 놓는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두 손이 자유로운 대가로 두 손은 쉴 새 없이 일해야 한다.
계절은 여름을 향해가고 있지만 계절감과 전혀 상관없이
긴팔 니트와 점퍼에 몸을 꽤어 넣는다.
청바지는 빠는 게 아니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상식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지켜
무릎과 엉덩이가 맨들 거리는 청바지에 나머지 반쪽의 육신을 쑤셔 넣고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며 동시에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소변을 보는 것과 매무새를 가다듬는 행위가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는지 궁금증이 일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을 설명해 줄 의무 따위는 없다.
수전의 방향이 온수 쪽을 가리키고 있지만 미쳐 물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손을 헹구고는 젖은 손이 마치 모든 더러운 것을 씻겨주는
성수인 것 마냥 대충 눈에 보이는 눈곱을 지우고는 멋대로 뻗친 머리를 슥슥 눕힌다.
차가운 냉수 한잔을 털어 넘기고 적막함과 어둠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문을 닫고
승강기에 버튼을 누르고는 빨갛게 번쩍이며 바뀌는 숫자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응시한다.
18F 내 기분을 알기라도 하듯 승강기의 숫자는 그곳에 멈춘 채로 곧 문이 열린다.
'타기 싫다.'
작게 읇조린 외침을 외면하듯 내 발걸음은 그 좁고 상하로 왕복하는 '방'으로 걸어간다.
침대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란 진채 문이 닫히고 그 '방'은 이내 하강한다.
1층에서 문이 열리고 세상으로 향하는 복도의 끝에는 새벽녘에 푸르른 어둠이 보인다.
문명전 원시인이 된 기분이다. 동굴밖으로 한 발자국 나서면 세상은 온갖 맹수들과
독충과 질병 또 다른 부족의 습격과 같은 감당 할 수 없는 위협들로 가득할게 분명하다.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로 만들어진 동굴에 문이 열리고 무언가에 등 떠밀린 듯 잔뜩 웅크린 몸으로 동굴밖으로 한걸음 나선다.
버스 정류장은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우울한 날씨 탓인지 어째 힘겹고 길게 느껴졌다.
날씨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다 문득 날씨가 좋은 날 회사에 출근하는 기분이 더 나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 뜻은 아니다.
정류장에는 몇몇 사람들이 각자의 도살장으로 향하는 차를 스스로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모두 초점 없는 눈동자로 어둡고 푸른 새벽을 뚫고 세상을
밝히는 한줄기 스마트폰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구부러진 등을 한껏 더 구부리고는 세상의 소란함과 타인의 관심을 함께 차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와 색상의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그들과 나는 영혼 없이 흐릿한 초점의 눈동자로 뿌연 세상 속에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 연결된 하나의 동족이며 부족민이다.
다만 부족민들 간의 아는 체는 암무적으로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한나절과 같은 5분 쯔음이 지나고 목적지를 가기 위한 경유지가 목적지인 버스가 도착했다.
이 차를 타면 오늘의 안락함과는 정말로 작별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한 마음과는 다르게 무거운 다리는 저절로 버스 계단을 오른다.
버스 안에는 역시 같은 부족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함께 각자의 사냥터를 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