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재활 병원의 2주간 입원 생활은 너무 우울했다.
아기가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 알 수 없는 너무나 막막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 앞에 서 있는 나를 누군가 어두운 동굴 속으로 밀어버린 기분이었다. 우리가 입원한 병실은 4인실이었다. 그곳에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 둔 어린이도 있었고, 콧줄을 끼고 누워있는 아이도 있었다. 한 쪽발이 불편한 듯 절뚝이며 걷는 아이도 있었고, 아예 휠체어에 탄 아이도 있었다. 모두 집중 재활 치료를 받기 위해 2주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들이었다. 그 중에 한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길래 처음에 아기인 줄 알았다. 3-4살 정도 되었다는 얘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두 돌, 세 돌이 지날 동안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데리고 입원해 하루에 두 번 재활 치료를 받으며 식사 시간에는 콧줄로 음식을 넣어주던 그 엄마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이 아기 때문에 둘째는 생각도 못한다면서도 너무나 밝고 씩씩하게 웃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그 웃음 너머에 있을 눈물과 아픔을 알기에 참 긍정적이라고 마냥 좋게 볼 수만은 없었다. 이제는 그 슬픔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될 때쯤 한번씩 찾아오는 서러움과 서글픔을 꾹꾹 누르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을 밤을 알기에 자꾸 안쓰러웠다.
2주 동안 치료받으면서 아기가 더 좋아졌을까?
절대 아니다. 아기는 똑같았다. 여전히 못 걸었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네발기기를 조금씩 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잡고 섰다가도 못 버티고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조금 늦게 걷는 아기들도 있으니 마음에 여유를 갖자고 스스로 다독이며 치료에 임했다. 이 때부터 다른 또래 아기들과 확연히 다른 게 있었다. 아기가 한 손으로만 놀았다. 오른손으로만 장난감을 집어서 흔들며 놀았다. 두 손을 같이 써야 눌러도 보고, 문질러도 보고 할텐데, 한 손만 사용하다보니 장난감을 들어서 흔들거나 바닥에 치면서 노는 게 다였다. 생후 6개월 때부터 작업 치료도 같이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 치료 선생님이 왼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두 손으로 물건을 잡는 법, 왼손으로 물건을 집는 법, 왼손으로 버티는 법 등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30분 치료로는 어림도 없었다. 치료 시간 외 나머지 시간은 자기가 편한 손만 사용하기 때문에 왼손은 그냥 장식품이었다. 내가 쫓아다니면서 왼손을 계속 쓸 수 있도록 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나름대로 많이 애썼지만, 점점 오른손만 더 쓸 뿐이었다.
지금은 오른쪽 팔뚝이 왼쪽 팔뚝의 1.5배 정도 된다. 말귀를 알아듣고 지각이 생길 때 쯤 왼손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지만, 아이는 알면서도 자꾸 한 손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손 한쪽 없는 사람도 있는데, 왼손 좀 못 쓰면 어떠냐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되서, 혹은 정상 발달 중에 한 손을 잃은 것과 태어나면서부터 왼손을 안 쓰는 것은 완전 다른 문제다. 왼손을 사용하면서 몸통 힘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왼쪽 몸통 힘이 길러진다.
뱃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이드신 분들 배의 근육이 빠지면 허리가 굽는다고 하는데 같은 원리다. 왼손을 사용하면 왼쪽 몸통와 배 근육까지 같이 자란다. 보통은 오른손와 왼손을 균형있게 사용하며 몸통 힘이 생기고 직립 보행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왼손을 쓰지 않으며 몸통과 배 근육이 자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결국 오른쪽만 근육이 발달하기 때문에 몸이 한쪽으로 찌그러지게 된다. 지금 우리 아이는 걸을 때 왼쪽으로 치우치면서 뒤뚱뒤뚱 걷고 있다. 성장하면서 생긴 여러 문제들은 수술로, 재활로 해결이 되었지만 이 부분은 끝내 고치질 못했다. 이제 성인을 코 앞에 둔 나이에 더 좋아질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씩 덜 나빠지기만을 바랄 뿐.........
2주 입원 기간이 끝나고, 난 3월에 복직을 했다. 원래 다니던 대학 병원과 재활 병원까지 일주일에 세 번으로 횟수가 늘었고, 치료는 친정 엄마가 데리고 다니게 됐다.
아픈 아이를 키우며 계속되는 우울감과 위축된 마음이 너무 커져서 주변 사람들과 연락도 끊고, 교회에 가면 예배만 드리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알은 체라도 하면 혹시 우리 아이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눈인사만 얼른 하고 돌아섰다. 어차피 돌 전까지 아기들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안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가 문제가 있는지 전혀 모르는데도 도둑이 제발 저리는 마음으로 괜히 내가 피해버렸다.
그러다 복직한 학교는 천국이었다.
내 아이에 대해 아무도 묻질 않았다. 때때로 인사치레로 "아기가 잘 크냐?" 고 물으면 '잘 크고 있다'고 대답하면 그 뿐이었다.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다 잊었다. 아니, 잊으려고 잊은 게 아니었다. 학교에 오면 해방감을 느꼈다.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일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1학기가 지나고, 여름 방학동안 1급 정교사 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를 받기로 한지 얼마 안되서 둘째가 찾아온 걸 알게 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