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걷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탐색해야 할 때, 장애인이 되었다.
큰 아이가 첫 경기를 하던 날, 응급실에서 주사 맞고 경기는 멈췄지만 꼼짝도 안 하고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아이를 보니 두렵고 무서웠다. 무너진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병원 로비 의자에서 계속 울던 내가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의 슬픈 감정과 함께...... 임산부가 그렇게 울면 안 된다고 친정 엄마가 다독였지만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하면 둘째 아이한테 너무 미안하다.
뱃속에 있을 때, 첫째가 여러 번 경기하는 바람에 많이 울었다. 그래서일까? 둘째 아이는 유난히 정이 많고 따뜻하다. 다른 사람 마음을 먼저 헤아릴 줄 알아서인지 늘 주변에 친구들이 있다.
경기는 해도 재활은 계속되었다. 응급실에서 하룻밤만 자고 나면 퇴원하니까 일상은 다시 반복된다.
돌이 지나고 집중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 후, 원래 다니던 대학병원 물리치료실이 대기로 넘어가면서 새롭게 재활 치료하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지원받아 운영하는 곳을 우연히 알게 되어 다니게 됐다. 아이는 거기서 물리, 작업, 언어치료까지 받았다. 만 18개월에 될 때쯤, 언어치료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해서 얼떨결에 시작했다. 보통 아이들도 18개월이면 말을 잘 못 하는데 무슨 언어 치료를 할까... 싶었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촛불 끄기 연습이었다. 왼쪽 손과 발만 기능이 약한 줄 알았는데, 입술도 그랬다. 입술도 오른쪽이 더 잘 움직였다. 일부러 왼쪽 입술과 안면 마사지도 해주고 근육을 자꾸 움직이도록 치료했다. 그때 아이랑 촛불 끄기를 많이 했다. 신기하게 후~~ 부는 법을 몰랐다. 방법을 가르쳐주고 따라 해 보라고 해도 후~하고 말로 따라 하지, 숨을 모아 입술을 오므려 만든 구멍으로 내보내는 걸 못 했다. 내 기억에 꽤 커서 가능해졌던 것 같다.
그 치료실의 물리 치료사 선생님은 그동안 만났던 분들과 치료 목표가 달랐다. '무조건 걷게 만들어야 한다, 무조건 걷는 훈련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하셨다. 그동안 몸통의 힘을 기르고 천천히 걷게 하자면서 네발기기만 열심히 시켰지만, 우리가 그 치료실을 선택한 이상,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게 아이에게 더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치료실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던 친정 엄마는 돌이 지나고서도 한 발짝 떼기 어렵던 아이가 조금씩 걸으니 그저 신기해하셨다. 난 출근을 하면서 맡겨야 하는 입장이니 내 의견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저 치료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 치료실에 다닌 지 4-5개월쯤 되었을 때 아이가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생후 19개월이었다.
한번 걷더니 점점 능숙하게 걸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이가 왼쪽발을 까치발로 걸었다. 게다가 절뚝이면서 걸었다. 한 쪽발은 까치발로 하고 절뚝절뚝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어 그래도 기뻤다.
한번 걷기 시작하자 네발기기는 더 이상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제 돌 지난 아이를 설득해서 네발기기를 하게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이가 걷는 자세를 본 재활의학과 의사 선생님은 보조기를 맞추자고 하셨다.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도록 고정해 주는 종아리 길이의 보조기였다. 보조기는 그때 당시에도 60만 원이 넘는 고가였다. 아이가 발이 금방 자라서 보통 신발도 1년에 한 번씩 사줘야 하는 것처럼 보조기도 1-2년에 한 번씩 새로 맞춰야 했다. 장애인 복지카드가 있으면 금액의 90%를 정부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알고, 현재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지만 장애인 복지카드를 만드는 건 다른 문제였다. 조언을 구할 사람은 이런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치료사 선생님들밖에 없었다.
'한번 복지카드를 만든다고 해서 아이가 영원히 장애인으로 낙인찍히는 건 아니다, 자라면서 계속 갱신해야 하는 거니까 나중에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라고 하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고민을 했지만, 현실적인 문제 앞에 난 복지카드를 발급하기로 결정했고, 재활의학과 의사 선생님은 4급 판정을 내렸다.
내 아이는 4살, 두 돌이 조금 지나 공식적인 장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