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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양육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은

장애를 가진 아이를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다

by 해피써니

아이가 7세가 되었을 때, 집 앞에 있는 학교의 병설 유치원에 보냈다. 왼쪽 손과 발을 잘 못 써서 불안정하게 찔뚝찔뚝 걷고, 오른손만 주로 사용하다 보니 양손으로 하는 활동(만들기나 악기 연주 등)뿐만 아니라 급식판 들기도 안돼서 도움이 필요했다. 유치원이라는 곳이 교육기관이기에 그동안 다녔던 어린이집과는 친절도부터 다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도 서운한 일은 종종 생겼다.


어린이 대공원으로 유치원 소풍을 간다고 했다. 하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간 나에게 선생님은 '거긴 워낙 넓어 식물원만 가더라도 버스주차장에서부터 많이 걸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걸음이 불편한 우리 아이가 내심 안 가길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다.(이건 내 기억의 오류일지도....) 소풍을 갈 건지 물으셨고, 어린이집 때처럼 당연히 가겠다고 했다. 어린이집은 동네 작은 어린이집이라 아이들이 많이 없어서 늘 친절하게 대하며 체험학습도 당연히 가는 걸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를 보내려면 엄마가 따라와야 한다고 했다. 동생이 둘이나 있었지만, 안된다는 말을 못 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네, 그렇게 할게요.' 뿐이었다. 그 당시 육아 휴직 중이라 둘째는 어린이집에, 막내는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따라갔다. 같이 버스를 타고 갔었는지, 내 차로 따로 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너무나 선명한 것은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던 모습이었다.

식물원 관람이 끝나고 점심 식사 후,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 나도 학교에서 체험학습으로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다녔지만,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놀이터 자유시간을 이길 수 없다. 그만큼 최고의 시간이다.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나 좋아하면서 시소와 그네,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지 보는 내가 다 신났다. 아이들 3-4명씩 무리 지어 시소 양쪽에 타고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내려왔다가를 반복했다. 시소가 나란히 두 개 있었는데 양쪽 모두 아이들이 가득했다.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나면 옆에 시소로 달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바꿔 탔다. 우리 아이는 시소 두 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기회를 틈타 아이들이 우르르 이동할 때 어디라도 끼어서 앉아보려고 하지만 재빠르게 달려와 의자 위로 쏙 앉아버리는 아이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앉으려고 찔뚝찔뚝 달려가면 이미 다른 아이들이 차지해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음 같아서 당장 달려가 양보 좀 해달라고, 어쩜 그렇게 한 번을 안 비켜주냐고 훈계(?)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하질 않았다. 마음은 울고 있었지만, 끝까지 태연하게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양육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은 '20살에 독립시키기'였다. 비장애인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독립의 과정을 겪지만 이 아이는 일부러 그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무조건 다른 사람을 의지하려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하다. 내가 부모로서 이 아이를 키우면서 잘못한 부분들도 분명 있겠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내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그래서 가능하면 뭐든지 혼자서 해보게 했다.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많은 아이라 아무래도 주변에서 도와주는 게 일상인 아이에게 "너 혼자 해 봐."를 입에 달고 살았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양손을 하는 일들이 많다. 잠바 지퍼 올리는 일, 급식판 받아주는 일, 운동화 끈 묶는 일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어쩌나, 지켜 줄 부모가 없어도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야 할 텐데 하는 염려와 걱정, 두려움이 날 강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아이는 양쪽 시소 사이에서 이리저리 뛰어만 다니다가 자유 시간이 끝났다. 그 누구도 우리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선생님조차도...... 마음이 많이 무너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상황들이 앞으로도 수없이 생길 텐데 그때마다 내가 도와줄 수 없기에 아이 스스로 감당해내야 할 부분이라고 결론지었다. 내가 그 상황에서 끼어들지 않았던 걸 난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근무해 보니 아이가 어리다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연락해 오는 학부모들이 있다.

"선생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하면서 연락 오면 다행이다. 아이가 어떤 큰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해 앞뒤 안재고 대뜸 화부터 내는 학부모도 여럿 만나면서 학급 안에서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는 아이의 뒤에 어떤 학부모가 있는지 보게 되었다. 스스로 자기 일을 챙겨서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 뒤에는 대부분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가 있었다. 설령 불편한 일이 있어도 당장 화부터 내지 않는다. 유연하게 넘길 줄 아는 학부모를 보면 자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나의 이런 양육관도 한몫했지만 연이어서 태어난 동생 둘 덕에 아이는 꽤 의젓하게 자랐다.

다른 사람 이야기도 듣고 공감해 줄 줄 알고, 학교에서는 학습은 잘 못 따라가도 일찍 등교해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한다. 불편한 몸이지만 교실 청소같이 단순한 '일인 일역'도 스스로 맡아서 한다. 얼마 전에는 재활용 버리는 담당인데 방과 후에 하고 오느라 늦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서일까? 담임 선생님들이 학교 생활로 인해 연락해 오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자녀를 학교를 보내본 사람은 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것을!!!!

며칠 전에 식사하면서 학교 생활 어떠냐고 물으니 '재밌다'라고 답변했다. 고3이 학교가 재밌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맘 편히 즐겁게 다니고 있으니 그것마저도 감사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딱 한번 내가 담임 선생님께 전화드린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때 아이가 힘들다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무심코 넘겼다. 지금까지 학교생활 혼자서 잘 해왔으니 좀 힘든 일도 지나가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여러 번 말했다. 자초지종 물어보니 반에 짓궂은 남학생 3명 정도가 우리 아이를 괴롭힌다는 거였다. 그 당시 다리 수술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워커'를 잡고 밀고 걸어 다녔는데 의자에 앉으면서 한쪽에 놓아둔 워커를 그 친구들이 맘대로 가져다가 장난감처럼 갖고 논다는 거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기분 좋게 장난치는 수준이 아니라 기분 나쁘게 괴롭힌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하니까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변한 게 없다고 했다.


'아이가 스스로 이겨내도록 좀 더 기다려야 할까, 개입해야 할까' 많이 망설였다.

고민 끝에 수화기를 들었다.

이미 담임 선생님도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고 계속 지도하는데 말을 잘 안 듣는다며 힘들어하셨다. 더 이상 내가 담임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없었다. 교실 안에서 지도하고 있지만 잘 안 되는 상황을 나도 잘 알고 있기에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그 해에 도움반 선생님으로 경력 많은 남자분이 오셔서 아이들을 불러다가 장애인 괴롭히면 학폭 신고 시 가중 처벌된다며 엄포를 놓은 뒤로는 안 건드린다는 얘기를 나중에 아이를 통해 듣고 마음을 놓았다. 그 뒤로 별 탈없이 잘 보내다가 졸업했다.


그렇게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코로나가 터졌다.

초등학교 1학년도 코로나로 많은 걸 잃었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 중학생에게도 코로나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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