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울지 않고, 죽지 않는, 그리고 갈라서지 않는

단편선 순간들 <음악만세>를 듣고 일년이 지난 오늘의 감정을 담아.

by 루카

2024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정확히 2년이 되는 날, 나는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156명의 젊은 생명들을 기억하는 시간은 무겁고도 슬펐다. 추모 메시지들을 읽고, 조용히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의 친구이고, 누군가의 자녀다. 희생자들과 같은 또래, 같은 세대라는 점에서, 그들이 가지 못한 길을 나는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5호선 지하철 안. 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추모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모의 무게와 개인의 삶, 그 간극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음악 스트리밍 앱을 켰고, 화면에는 "단편선 순간들”의 [음악만세]가 추천되어 있었다. 제목을 보고 클릭하기 전, 나는 먼저 앨범 소개글을 읽었다. 밴드의 리더인 “단편선”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계를 함께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다."*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스크롤을 내려 더 읽었다. "함께 언덕에 오르고 싶다. 경치를 둘러보고 싶다. 그늘 아래 모여 앉아 김밥을 나누어 먹기도 하면서." 그리고 소개글에 적힌 "물에 잠기면서 시작해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끝나는 이야기"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 말은 내게 두 가지로 들렸다. 첫 번째는 이태원에서 돌아오는 살아남은 자들과 가족들의 연대였다. 두 번째는, 비단 이태원 참사의 고통뿐 아니라, 각자의 고통 속에서도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줄곧 내가 겪는 아픔은 나만의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공유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세계를 함께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기에, 우리는 서로 연대해야 함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곡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이 벅찬 연대의 메시지는 음악적 형식 자체에서도 구현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듯한 극적인 멜로디가 지하철 안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가사는 따로 없는 대신 김진숙 노동운동가의 연설이 샘플링되어 있었다. 연대의 메시지가 음악으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즉시 이 벅찬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으나, 글을 쓰는 행위와 실제 공유 사이에는 반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침묵의 시간은 음악이 던진 '같이 가자'는 메시지를 개인의 의무로 내재화하는 숙고의 과정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공유를 결심했을 때, 그 행위 자체가 내게는 수동적 위로를 넘어선 능동적인 연대로서 거듭났다.


다시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그 앨범소개글을 읽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 "아무도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이상에 대해 끊임 없이 갈망해야 하고, "갈라서지 않을 어딘가"를 향해, "타오르는 불길로 다시 뛰어들 용기"를 갖고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자의 의무기 때문이다. 음악이 준 위로를 내 언어로 옮기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같이 가자"였다. "같이 가자"는 "함께 있어줄게"와는 다르다. 후자가 수동적 위로라면, 전자는 능동적 연대의 제안이다. 위로 받는 것을 넘어, 함께 움직이는 것. 그것이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 이후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함께 견뎌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씩 실천했다. 예를 들자면, 참사 유가족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나 인터뷰, 팟캐스트 등을 꾸준히 찾아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침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히 이태원 참사 뿐만 아니라, 다른 이슈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찾아보기 위해 노력했다. 단순히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비극을 잊지 않고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하는 능동적 연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마음 속의 고민들과 아픔을 혼자 버티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힘든 상황을 털어놓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소외되거나 고립된 이들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작은 움직임부터 실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이나 목소리를 두려워했지만, 정작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도움을 청하는 것도 "같이 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그렇게 나는 또한 내가 먼저 누군가의 동행인이 되기로 했다. 진로 문제로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먼저 연락해 대화의 자리를 만드는 등, 작은 실천들로 능동적인 연대를 구체화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 어느덧 막학기를 맞이한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이 불확실하다. 진로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고, 인간관계도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함께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인생은 음악과도 같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황홀하게 다가온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도, 미움 받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 만드는 음악은, 바로 '아무도 울지 않고, 더 이상 갈라서지 않을' 어딘가로 함께 나아가도록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능동적 연대,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게 타오르는 불길로 다시 뛰어들기 위해, 나는 어딘가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누군가와 함께 불협화음을 내며, 욕을 먹더라도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아무도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이 조곤조곤 읊조리며,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음악 만세.


*단편선 순간들,〈음악만세〉, 《음악만세》, 오소리웍스, 2024,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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