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 <멜랑콜리아>
불시에 찾아오는 종말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매일 밤 잠자리에 종말과 함께 눕는다. 현관문 바깥에서 나를 맞이하는 건 햇빛도 바람도 아니다. 대기는 살을 에고 작열하는 태양은 피부를 녹인다. 매일이 핵전쟁이고 숨 쉬는 모든 순간이 멸망이다. 우울이란 게 그렇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종말론을 깨웠다. 밀레니엄 버그는 그간 제기된 수많은 종말론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새천년을 앞둔 설렘은 공포가 됐다. 안전히 21세기로 넘어온 현재, 종말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여전히 끝이 없다. <2012>, <투모로우> 등 파괴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영화부터 <설국열차>, <칠드런 오브 맨> 등의 멸망 속 낙관을 찾는 영화까지. 왜 우리는 계속해서 종말을 이야기하는가.
아포칼립스 장르는 문명의 쇠락과 대규모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꼭 행성 충돌, 지구멸망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장르의 폭을 넓게 잡아 논할 수 있다.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 시리즈는 핵전쟁 이후의 지구가 배경이다. 인류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끔찍한 예언이 영화를 관통한다. 약탈, 전쟁, 독재, 살인이 만연한 세계가 우리의 미래임을 경고한다.
<28일 후>, <부산행> 같은 좀비영화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함께한다. 법과 제도, 화폐가 실체 없는 유령에 불과하다는 일종의 고발 뉴스에 가깝기도 하다. 좀비물이나 재난물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건 초자연적 존재와 더불어 인간이다. 힘겹게 쌓아 올린 상식과 문명이 도미노처럼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다는 걸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제 아포칼립스(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는 일종의 사회학 실험이 돼버린 듯하다. 서사는 비유에 충실하고 인물은 집단을 대표한다. 장르 자체에 아쉬운 소리를 보내는 건 아니다. 우리가 종말을 꿈꾸는 원인이 궁금할 뿐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는 ‘어떻게 종말에 대응할 것인가’란 장르적 질문에서 벗어나 개인의 종말을 집요하게 쫓는다. 영화 시작부에서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던 저스틴의 얼굴은 지구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밝아진다. 다른 아포칼립스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없던 캐릭터 유형이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게 있을까? 물리적 종말보다 더 끔찍한 종말이 있을까? 운석까지 끌어당기며 우리에게 묻는다. 영화가 끝나면 엔딩크레딧을 멍하니 보며 질문의 답을 곱씹게 된다. ‘종말’을 주제로 한 영화를 떠올릴 때 <멜랑콜리아>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의 배경은 저스틴의 결혼식이다. 시작부터 난관이다. 식장으로 가는 길이 좁아 리무진이 들어가지 못한다. 겨우 도착하니 언니 클레어는 하객들이 한참 기다렸다며 성을 낸다. 쉽지 않은 하루가 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도입부다.
저스틴은 결혼식을 망친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보는 이를 괴롭힌다. 하객들이 기다리는데 목욕을 하고, 잠을 자고, 모르는 남자와 섹스까지 한다. 1부 내내 저스틴의 정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까닭 없는 우울’이다.
영화 속 저스틴은 완전히 고립됐다. 자신의 결혼식에서조차 타인이다. 가족, 직장 동료, 친구들과 아무런 소통도 하지 못한다. 하객들은 피로연에서 자기 이야기만 하기 바쁘다. 직장 상사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저스틴에게 아트 디렉터 자리를 맡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들의 이혼을 두고 입씨름만 벌인다. 결혼 제도가 싫다는 어머니의 발언에 장내는 술렁인다. 결국 저스틴은 피로연 도중 자리를 떠난다. 이 세계에 속하지 못한 자신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식장을 빠져나온 저스틴은 골프카를 타고 사라진다. 적막 속에서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다. 부디 이 지구가 폭발해 모든 게 끝나길. 도저히 발붙이고 살 수 없는 이 행성을 떠날 수 있길.
남편(일 뻔했던) 마이클과 그의 가족은 망한 결혼식을 뒤로하고 식장을 떠난다. “이럴 줄 알았잖아”.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스스로를 향한 질타로 들린다.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한 삶.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한 번 기대해 봤을 뿐이다. 잘 안될 걸 알면서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 견뎌보려 했으나 그의 세계는 기필코 폭발하고 만다. 파편 한 조각조차 없는 종말이다.
1부 내내 진득하게 끌어낸 저스틴의 얼굴에서 우울증에 관한 탁월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고립을 두려워한다.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을 차라리 남이라도 알아주길 바란다. 오싹할 정도로 내가 혼자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 이미 종말은 코앞이다. 1부의 마지막 장면은 짐짝처럼 쌓인 하객 의자에 홀로 앉은 저스틴의 모습이다. 아무도 함께 울어주지 않는 죽음이다. 이제 영화는 2부에서 온 힘을 다해 저스틴의 소원을 들어준다.
1부와 2부의 촬영법은 대조적이다. 마치 다른 영화를 억지로 이어 붙인 듯하다. 이런 노골적인 연출법은 영화의 서사와 맞닿아 있다. 1부의 카메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핸드 헬드 방식으로 대부분 움직인다. 그와 달리 2부는 롱 쇼트로 연출됐으며, 인물보다 풍경에 집중한다.
배우의 얼굴을 밀접한 거리에서 보여주는 1부의 클로즈업 화면들은 답답함을 고조시킨다. 관객들은 저스틴과 주변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변화와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모조리 지켜봐야만 한다. 고역이다. 마치 내가 이 결혼식에 초대받은 듯 좌불안석이다.
인물의 심리를 집요하게 쫓는 이런 연출은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걸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1부와 2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1부는 결혼식이 열리는 짧은 하룻밤의 이야기인 반면, 2부는 비교적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이는 저스틴과 클레어가 느끼는 각기 다른 우울의 양상으로도 볼 수 있다.
저스틴의 하루는 길다. 그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우울증 환자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우울의 양상은 알러지 환자들이 그렇듯 저마다 증상이 다르다. 그러나 1부에서 저스틴이 보여준 모습만 보았을 때, 그는 분명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 정체는 알 수 없어도 나를 구원해 줄 무언가를 말이다. 가령, 이름 모를 행성과의 충돌이랄지.
그렇기에 1부의 시간은 느리다. 스크린 속 저스틴이 도망치고 싶은 만큼이나 영화를 보는 우리도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속절없이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한다. 불안과 우울이 나라는 세계를 좀먹는 1분 1초를.
결혼식이 열리는 장소는 우스울 정도로 화려하다. 디즈니 영화 속 공주가 사는 으리으리한 성 같기도, 혹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이 펼쳐지는 별장 같기도 하다. 얼핏 보이는 자연풍경도 아름답다. 이런 매혹적인 무대를 뒤로 하고 라스 폰 트리에는 작정이라도 한 듯 저스틴의 얼굴만 쫓는다. 그가 탐구하고자(혹은 보여주고자) 하는 건 오로지 저스틴의 정동일 뿐이다.
다른 공상과학 영화나 아포칼립스 영화들은 행성급 스케일의 재난을 보여준다. 레이저 빔 하나에 행성이 사라지고(<스타워즈>), 화산 폭발과 해일에 맞서 주인공은 사투를 벌인다(<2012>). 그런 장르적 관습에서 보자면 <멜랑콜리아>의 1부는 종말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2부보다 1부가 그 어떤 재난보다 무섭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1부 후반부에서 저스틴은 망원경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엔 등불에 가려진 까만 하늘밖에 없다. 망원경에서 고개를 뗀 뒤 눈을 감으니 비로소 우주가 보인다. 보지 않아야 보이는 것. 이 영화를 어떤 장르영화보다도 스케일이 큰 전우주적 종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눈을 감으면 터진다. 펑. ‘나’라는 세계가.
이제 2부 이야기를 해보자. 2부는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하는 디데이를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후반부는 저스틴보다 클레어의 얼굴에 집중한다. 클레어와 그의 남편은 지구 멸망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와 달리 저스틴의 모습은 초연하다. 마치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듯 평온해 보이기도 한다.
클레어는 물리적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저스틴의 공포가 실존적 죽음, 자아의 상실에 의한 거라면 클레어의 불안은 보다 실체가 명확하다. 2부를 끌어가는 인물은 클레어지만 우리는 여전히 저스틴의 우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멜랑콜리아와의 충돌을 앞두고 클레어 부부는 불안에 떨지만, ‘정말 지구가 멸망하는 걸까? 저스틴의 바람이 아닐까?’라는 질문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1부에서 저스틴은 유일하게 병 속에 든 콩이 678개라는 걸 정확히 맞춘다. 그가 예언적 인물이라는 점은 2부의 행성충돌을 섬뜩하게 만든다. 이 종말이 곧 저스틴의 불길한 상상이 아닐지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2부의 시간은 1부와 다르게 흘러간다. 1부가 견디는 자의 이야기였다면, 2부는 기다리거나 도망치는 자들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서사의 진행속도는 곧 인물의 정서를 반영한다. 철사를 구부려 행성 ‘멜랑콜리아’의 속도를 측정하는 클레어와 멍하니 결혼식이 끝나길 바라던 저스틴의 심리는 야속하게 다르며, 또 무섭게 닮아있다. 무엇이 됐든 두 사람의 공통적 정서는 ‘무력감’이다. 그들은 각자의 종말을 각자의 방법으로 견딘다.
라스 폰 트리에가 지구종말을 우울에 빗댄 이유에 대해선 굳이 논할 이유가 없다. 21세기의 아포칼립스 영화를 보며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왜 우리는 종말을 상상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지 물어야 한다.
영화 <테이크 쉘터>(제프 니콜스, 2011)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종말을 이야기한다. 자주 <멜랑콜리아>와 같이 언급되는 만큼, 두 영화는 닮은 듯 다르다. 주인공 커티스는 계시처럼 종말에 대한 꿈을 꾸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방공호를 짓는다.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제 발로 상담사를 찾아간다. 저스틴과 커티스를 관통하는 건 ‘앎’이란 예언자적 공포다. 저스틴은 이 세계가 끔찍하다는 걸 안다. “지구는 사악해. 우리는 지구를 위해 비통해할 필요가 없어”라는 자조적 말까지 내뱉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재판까지 갔다. 저스틴이 지구사악설을 내뱉었다고 해서 죄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400여 년 전인 그때나 지금이나 ‘앎’이 고통이 되는 건 여전하다. 그러니 사유는 곧 불안과 우울이 된다는 다소 엉성한 등호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테이크 쉘터>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근심이 눈앞에 나타날 때, 우리는 이게 상상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해진다. 차라리 종말이 진짜이길 바라는 마음은 <멜랑콜리아>와 <테이크 쉘터>모두 마찬가지다. 두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쳐다보며 곱씹었던 그 속삭임 속에서 21세기 우리가 종말을 꿈꾸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종말이 현실인지 아닌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차라리 진짜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은 늘 타인의 이해를 바란다.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불안감을 드러내고, 심리상담가를 찾아가고,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내가 아는 것을 부디 남도 알아주길 바란다. 우울은 세계와 내가 어긋나는 그 순간 찾아온다. 나는 정지하고 세계는 바삐 움직일 때, 종말을 꿈꿔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거창하게 우리가 종말을 꿈꾸는 이유를 찾겠다고 문장을 열었지만, 결국 어떤 말을 해도 텍스트를 햄버거처럼 누르는 기분이다. 고용의 불안정, 극심한 부의 양극화, 중산층의 몰락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다. 영화 속 얼굴에 집중하고 싶다. 그게 곧 저스틴과 클레어, 그리고 커티스가 바랐던 것일 테다.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멜랑콜리아’처럼, 이유를 모르는 것들이 있다. 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그런 것들.
장르의 흐름 안에서 봤을 때 <멜랑콜리아>와 <테이크 쉘터>가 주목받는 이유는 명백하다. 현세대가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외로움’이다. 핵전쟁 위험, 경제 위기, 환경 위기 등은 여전히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그와 더불어 우리 세대는 ‘우울’과 사투를 벌인다. 매년 전세계에서 80만 명 넘게 자살한다. 실체 없는 적과 싸우는 사람들의 수는 셀 수도 없다. 정신 건강이 가장 큰 화두인 지금, 종말 이야기가 바깥의 우주에서 내면의 우주로 옮겨간 것은 당연하다. 두려움이 곧 이야기가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클레어가 비로소 저스틴을 이해했을까? 아닐 거다. 영화를 보는 우리 또한 클레어의 행동이 저스틴의 행동보다 이해하기 쉬웠으니까. 결혼식을 망친 후 저스틴이 “나 노력했어”라 말하자 클레어는 “알고 있어, 넌 애썼어”라고 답한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두 대사가 자흔처럼 화면 위에 어른댄다. 노력하고 애써도 안되는 게 있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존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행성의 이름은 ‘Menlancholia(우울)’다.
우리는 영화 내내 저스틴을 따라왔다. 마지막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눈을 감은 조카의 손을 꼭 잡고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다. 행성이 충돌하고 대지가 화염에 휩싸일 때 느껴진 해방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정체를 알 수 없던 존재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고 나를 파괴하러 왔을 때, 역설적으로 그 파괴는 구원이 된다. “차라리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라는 비관적 농담을 던지는 이유는 다 같이 죽고 싶단 유치한 욕망보다는 그걸로나마 이 절망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타인의 우울을 구경하는 일은 윤리적이진 않아도 즐겁다. 우리가 끊임없이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는 많은 이야기가 비극이기 때문이다. 왜 종말을 이야기하냐는 질문을 비극을 읽는 이유까지 확장해볼 수 있다. 교훈, 사회비판 같은 이유는 뒤로하자. 그냥 우리 삶이 대체로 비극이라서다. 이야기는 곧 삶에서 나온다. 삶과 닮은 이야기를 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희극은 즐겁지만, 그 안에서 나를 찾기 어렵다. 요즘 세대가 비극보다 희극을 더 선호하는 건 그 안에서 나를 보고 싶지 않아서다. 오직 ‘유희’에만 집중하려면 절대로 영화 속에서 내 삶이 보여서는 안 된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비극이니까.
그러니 남의 우울을 구경하는 일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자. 그걸 위안으로 삼는 나를 탓하지 말자. 영화에서나마 나를 위해 지구를 박살내주니까. 나의 우울에 이유가 없듯 ‘멜랑콜리아’와 지구의 충돌도 그렇다. 신이 인간을 미워해서건, 지구의 자력 때문이건 간에 그건 그냥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의 우울에 이유를 묻지 말자. 아무도 함께해줄 수 없는 이 병을 지구 종말에 위로받아보자. 그걸로나마 통증이 한결 나아진다면, 그냥 그렇게 하자.
*서울예대에서 펴낸 문예지 <워드월드> 에 외부필자로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