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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라이프하다가 공무원 때려치우면 생기는 일

이래, 막 나가도 될까요?

by 세렌디피티

4년여를 고민했다.

그동안 미니멀 라이프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추진력으로 200여 개의 물건을 중고마켓에 팔고 버리고를 반복하더니 드디어 집에도 빈 벽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군더더기를 치우고 나니 그야말로 내 싦의 중요한 목표와 가치를 다시금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족'이었음을......

타고난 약한 체력을 가지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좀처럼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지난날을, 주말만 되면 산송장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아빠와 함께 외출하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던 무기력한 몸뚱이를, 사무실에서 하루에 몇 번을 '내가 오늘 당장 죽는 다면 이곳에서 일하고 있던 나 자신을 가장 원망할 것 같다'라는 생각을 수 없이 되뇌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것들을 이제 떠나보내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다.


좋지 않은 머리 탓에 피 터지게 공부해서 얻은 직업인 공무원을 내려놓기까지는 수많은 정신과 약과 가족들의 응원이 필요했다. 의심 많은 성격 탓에 가족들이 괜찮다고 엄마는 일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신을 마주하며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볼 용기도 점점 키워나갔다.


드디어 의원면직 신청서를 손에 들고 며칠이나 방황을 했는지 모른다.

이래도 될까? 정말 이래도 될까? 아직 대출도 남아있고, 남편 혼자 벌어 아이 둘을 양육한다는 게 무섭고 두려웠다. 사업하다 망해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아버지를 평생 바라보면서, 아버지가 쥐라고 했던 철밥통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평생 일하려고 다짐했었는데......

힘들어도 지쳐도 나와 함께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 동료들의 뒷모습도 자주 떠올랐다. 그들은 그래도 묵묵히 자신이 택한 길을 가고 있음을, 나처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는 그들을 생각하면 나 자신은 '인생의 패배자' 같다는 생각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꾸준한 신경정신과 진료와 함께 불면증 증상에서 벗어나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인위적으로 흡수를 억제시킨 세로토닌은 든든한 아군이 되어 좀 더 맑고, 밝고, 명료한 정신을 선물(?) 해 주었다.


물건들을 정리하며 정작 내가 가장 일 순위로 정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공무원이라는 '허울뿐인 훈장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 후 의원면직서를 제출하고 당장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아직도 내 곁에 있다는 든든함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 힘들다는 사표를 던지고 새 출발을 마음먹은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시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참 아이러니 했다.


의원면직이 받아들여지고 이제 공무원이 아닌 신분이 되었다.

공무원이 되려고 애쓴 건 2년 2개월 여의 시간이 걸렸지만 사표가 수리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무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기 전의 아무런 조직에 가입하지 않은 맨 몸뚱이로 돌아온 것이다.


주변의 주전부리를 치우고 나니 가장 중요한 가치와 물건들만 내 곁에 남게 되었다.

가장 소중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비로소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는 자체가 얼마나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당연하고 뻔한 것 같은 일상의 소중함을 우리는 무슨 일이 생겨야만 알게 된다.

이제 나의 가족과 함께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살아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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