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일기(6)
아침부터 비가 온다. 부산 지방에 호우와 강풍이 저녁까지 이어지니 가급적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안전 안내 문자가 반복적으로 휴대폰을 때리고 있다. 퇴직 후 아내와 함께 나들이가 출근이 된 우리는 출근길이 막힌 느낌이 들었다. 아내도 나와 함께 지난 2월 말 퇴직했다. 퇴직 후 장보기, 쇼핑하기, 쑥 캐기, 산책하기 등 많은 일상을 아내와 함께 했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아내가 친구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비는 오지만 친구 같은 아내와 온천천이라도 걷자며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온천천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 온천천을 걷노라면 팔뚝만 한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한 다리를 들고 무심한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왜가리의 모습도 만날 수 있고, 노란 주둥이로 연신 자맥질하는 오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온천천을 우리 부부는 친구처럼 친한 모습으로 자주 걷는다.
온천천은 부산 금정구, 동래구, 연제구에 걸쳐 흐르는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 하천으로 다양한 운동기구, 농구장, 배드민턴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의 시설이 있어 운동이나 여가 공간으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온천천을 흐르는 물은 금정산의 자연수와 낙동강 물금취수장의 물을 끌어와 공급하기 때문에 항상 맑은 물을 유지하고 있어 다양한 수생 생물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오늘은 온천천 수위가 온천천 인도를 침범할 정도로 높다. 비가 많이 올 때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이 우리를 저지했다. 금강공원이 떠올랐다. 금강공원 아스팔트 길을 왕복해서 걷는 것도 비오는 봄날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아 우산을 쓴 채 우리는 금강공원으로 향했다.
금강공원 북문으로 들어갔다. 부산민속예술관도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도 비에 젖어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좌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수백 년 세월을 머금은 채 비를 맞고 있었고, 소나무 사이사이의 크고 작은 나무들도 저마다 봄비를 흡입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이파리를 쳐들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우산을 맞댄 채 비에 젖은 봄 경치에 간간이 감탄사를 토해내며 금강공원의 한적한 길을 따라 걸었다.
로프웨이(케이불카)가 눈앞에 다가왔다. 로프웨이(ropeway)는 예전에 삭도(索道)라고 했다. ‘삭(索)’은 ‘찾다(색)’라는 뜻도 있지만 ‘동아줄(삭)’이란 뜻도 있다. 동아줄로 만든 길이란 뜻으로 ‘삭도’라고 했다. 로프웨이도 찾는 사람 없이 비에 젖어 있었다. 삭도를 지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포도(鋪道)’를 따라 걷노라니 건장한 젊은이 넷이서 우산으로 배드민턴 가방만을 간신히 씌운 채 왁자하게 걸어간다. 북문 말고 또다른 출구가 있나 싶어 따라가 보았다. 그들은 아스팔트 포도를 지나 나무로 만든 난간 길로 들어선다. 왁자한 소리가 끝날 때쯤 ‘부산 119 안전 체험관’이 나온다. 체험관 앞길로는 무수히 다녔는데 길이 이렇게 연결된 것이 신기했다. 보이는 것만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길을 따라 다시 금강공원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대나무 숲이 펼쳐진다. 대나무 숲도 그렇지만 대나무를 잘라 황톳길 가장자리에 매달아 놓은 조형물이 자신의 용도가 무엇인지 묻는 듯하다. 용도를 생각하며 걷는데 ‘생각하는 대나무 숲길’이라는 표지판이 우리를 반긴다. 봄비 덕분에 너무나 조용해서 대나무 숲길이 없어도 사색과 마음의 평화가 저절로 생기는데, 생각하는 대나무 숲길이 고요함 속에 맑은소리를 피워내 생각의 청량함을 덤으로 주었다. 친구 같은 아내의 좋아하는 표정이 우산 너머로 전해진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말이 있다. 물고기와 물의 관계라는 뜻으로,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물은 물고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고기는 물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이때까지 아내는 물고기와 같은 나에게 물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남은 인생은 내가 물이 되어 아내를 물고기로 살게 하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아내가 계획을 세우면 그것이 어떤 계획이든지 바로 실행하는 것이 물의 자세이자 수어지교의 기본이 아니겠는가.
대나무 숲길은 ‘이주홍 문학의 길’과 이어져 있었다. 평소 금강공원을 산책하면서 ‘임진동래의총’,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선생 공덕비’는 보았으나 ‘생각하는 대나무 숲길’, ‘이주홍 문학의 길’은 처음이다. 오늘도 날이 맑았다면 케이블카 타고 금정산에 오르기 바빠 이 길을 또 보지 못했으리라. 배드민턴 가방을 맨 젊은이들 덕에 금강공원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해같이 달같이만’이라는 시가 새겨진 이주홍 문학비도 비에 젖고 있었다. 비석은 비에 젖었지만 비석에 새겨진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은 해같이 달같이 젖지도 없어지지도 않을 듯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기니 ‘맨발걷기 황톳길’이 또 우리를 반긴다. 요즈음 윤산(輪山)을 찾아 거의 매일 맨발걷기를 매일 하던 터라 비를 맞으며 맨발걷기를 하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 같아 시도했다. 흙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다. 발가락이 간지럽다. 시원한 간지러움, 동심으로 돌아가라고 속삭이는 듯한 간지러움이 발가락에서 온몸으로 퍼진다. 타원형의 황톳길 가장자리에 세족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곳곳에 마련된 편의시설에 감사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발을 씻었다.
비오는 날, 금강공원의 한적함과 퇴직의 여유로움을 새삼 느끼며, 비를 맞아 붉은색의 줄기를 드러낸 채 우리의 퇴근길을 좌우에서 굽어보고 있는 소나무를 뒤로 하고 공원을 나왔다. 나는 우리가 친구이면서 부부인 관계, 부부이면서 친구인 관계를 내일도 모레도 이어가리라 생각하면서 친구 같은 부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202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