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일기(7)
자연 속에서 평온함과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곳, 걷기 좋고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길로는 문경새재가 으뜸이다. 문경새재는 고향에서 가깝기도 하고 처갓집 근처이기도 하여 자주 찾는 곳이다. 문경새재는 옛날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관문이었다. 특히 과거(科擧)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죽령이나 추풍령을 이용하기보다 조령(문경새재)을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이는 문경(聞慶)이란 지명이 ‘과거 급제라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새재’는 순우리말 고유 지명으로 ‘새도 쉬어 갈 정도로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이 명칭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통용되던 이름이다. ‘조령(鳥嶺)‘이라는 한자어는 ‘새’를 뜻하는 ‘鳥(새 조)’와 ‘고개(재)’를 뜻하는 ‘嶺(고개 령)’을 결합해 만들었는데, 15세기 초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이 명칭이 처음 보인다고 한다. 새재라는 이름이 주는 친근감과 새재가 안고 있는 역사적 현장성, 그리고 자연이 주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으로 유산(遊山)으로 산책으로, 계절에 관계없이 문경새재를 찾는 것 같다.
이번에 또 문경 여행을 계획한 것은 한 달 전에 영면(永眠)에 들어 괴산 국립호국원에 모신 장인어른도 뵙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내와 처가 식구들을 위로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문경새재를 찾기 위함이 크게 작용했다. 한 달 전 장인어른 장례식을 마치고 처가 식구들과 이곳 새재를 찾았었다. 사별의 슬픔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신록의 자연은 치유의 공간이 되어 주었다. 문경새재는 여러 번 왔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풍광으로,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맞아주었다.
지난 4월 경주 벚꽃놀이에 함께 했던 아내와 처형 둘, 처남댁 등 4인방은 이번에도 자연스레 합류하게 되었다. 장모님 역할을 해 주는 처남댁이 우리가 온다고 올갱이국에 곰국에 갖가지 밑반찬을 준비해 두었다. 그 고마움은 감동이 되어 늘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점심은 올갱이국으로, 저녁은 곰국으로 맛있게 먹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영순 숲’을 산책했다. 영순강(영강)변에 조성된 숲은 울창한 소나무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산책로 등을 잘 조성해 자연과 인공이 잘 조화된 싱싱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다. 눈을 비비고 나가보니 벌써 김밥을 싸고 과일을 깎고 문경새재 갈 준비에 한창이다. 문경새재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통에 아침밥을 먹고 서둘러 출발했다. 문경새재 1주차장에 도착했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주차장이 텅 비어 있다. 경주 벚꽃놀이의 4인방과 함께 문경새재 옛 과거(科擧)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사과밭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진짜 사과가 열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과나무도 심어놓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들’의 모형도 만들어 놓았다. 문경 사과가 유명하여 가을에는 이곳에서 사과 축제가 열린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들’이라는 동화에 사과가 등장하기에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 사과’라는 주제로 이런 모형들을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동화 속의 그 사과는 백설공주를 해치기 위한 사과가 아니었던가. 사과 축제에 동화적 요소를 차용하는 상상력까지는 좋았으나 먹어서 몸에 좋고 보아서 마음에 좋은 사과의 캐릭터 모형을 설치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설공주 모형을 지나니 ‘주흘관(主屹關)’이 당당하게 서 있다. 주흘관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제 1관문이다. 주흘관의 문루 앞편에는 ‘주흘관(主屹關)’이라는 현판이, 문루 뒤편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란 현판이 수려한 필체로 걸려 있다. 주흘관 좌우에는 돌로 쌓은 성벽이 위풍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주흘관 앞에 있는, ‘문경새재 과거 길’이라고 새겨진 타원형의 바윗돌이 이 길이 영남의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하던 길임을 증명하고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이 길을 걸어갔을 수많은 옛 선비들의 땀방울과 간절함을 느끼며 우리도 북쪽으로 걸었다. 탄탄대로다. 이 길이야말로 조선의 국도 1호선이다. 과거(科擧) 길에 나선 선비들은 자신의 삶이 이 길과 같이 탄탄대로가 되길 소망하며 이 길을 넘어갔을 것이다. 젊은 선비들이 꿈을 안고 걸었을 이 길을 지금 우리는 젊은 시절 꾸었던 꿈을 내려놓고 이 길처럼 건강한 아름다움을 내면과 외면에 간직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무언의 기도를 드리며 걷는다.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왼쪽 계곡에는 발원지를 알 수 없는 맑은 물이 투명한 자태를 뽐내며 쉬지 않고 흐른다. 길 오른쪽에는 두 뼘 가량의 폭으로 인공 수로를 만들어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인공 수로의 물은 마치 뱀이 사막을 기어가듯 소리도 없이 아래로 흘러간다. 가끔 장애물을 만나면 물이 갈라졌다가 합쳐지면서 내는 소리가 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어우러져 태고의 건강한 아름다움의 화음으로 들린다.
왼쪽 계곡에 ‘왕건교’가 보인다. 이 다리 건너편에 ‘문경 오픈 세트장’이 건립되어 있다. 여기에서 ‘태조 왕건’ 등 수많은 사극이 촬영되었다.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교실 반 칸 정도 크기의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궁예’의 최후가 촬영되었다고 길섶 표지판은 말하고 있다.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한때 넓은 영토를 차지했으나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으며 생을 강제로 마감해야 했던 한 인간의 비극적 서사 앞에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추고 삶의 무상감을 생각하며 묵념했다.
태조 왕건과 궁예의 삶을 뒤로하고 이곳을 오르내렸던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걷는데 오른쪽으로 ‘조령원터’가 보인다. 돌로 벽을 쌓아 주위를 둘러쌌는데 입구를 통해 들어가보니 꽤 넓은 공간 군데군데 큼직한 돌들이 놓여 있다.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시대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라고 입간판은 설명하고 있다. ‘동화원’, ‘신혜원’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근처에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들이나 봇짐을 진 상인들, 일반 길손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던 많은 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국밥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 뒤 또 길을 재촉하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세월을 넘어 그들의 삶의 숨결에 나의 삶의 숨결도 하나 보탠다고 생각하니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올라가니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아름드리 소나무가 길 가장자리에서 우리를 반긴다. 곧은 자세로 수백 년을 견딘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견딘 것이다. 소나무의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은 될 터인데 그 무거운 몸체를 지탱하기 위한 뿌리의 수백 년의 노고를 생각하니 숙연해질 뿐이다. 소나무의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소나무 옆에 ‘교귀정(交龜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취임하는 관찰사와 이임하는 관찰사가 만나 업무를 인계인수하던 장소이다. 교귀정 옆의 소나무는 인계인수하는 관찰사들에게 소나무 무게를 감당한 뿌리만큼이나 큰 노고를 백성을 보살피는 데 아끼지 말라고 부탁했을지 모를 일이다.
교귀정을 뒤로하고 계곡의 물소리와 두런거리는 4인방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노라니 소원성취탑이 보인다. 이 소원성취탑은 선비들, 상인들, 이런저런 사연으로 이 길을 넘던 길손들의 염원이 쌓여 만들어진 돌탑이다. 아마 현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쉼을 위해 온 사람들이 많으니 건강에 대한 염원이 이 돌탑의 높이를 키웠을 것이다. 나는 돌탑에 돌을 보태지는 않았으나 우리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돌탑을 지났다.
소원성취탑을 지나가니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제 2관문이라 할 수 있는 ‘조곡관(鳥谷關)’이 소나무 숲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의젓한 자태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의 긴장감을 차분히 달래주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조곡관 문루 뒤편에는 ‘영남제이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다소곳이 걸려있다. 조곡관 근처 소나무 밑에는 길손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여러 개의 평상을 배치해 두었다. 우리 다섯 명은 그늘이 두텁게 진 평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오전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아침은 먹고 왔고 점심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를 깔고 준비해온 김밥과 과일을 펼쳐놓았다. 한두 개씩만 먹자고 했지만 준비해온 것을 모두 먹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온 데다가 대화를 통한 에너지 소모가 산행과 합해져 식욕을 자극했기 때문이리라.
제 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은 다음에 올라가기로 하고 하산했다. 지난번 하행길에 맨발걷기가 참으로 상쾌했다. 이번에도 맨발로 걷기 위해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었다. 맨발로 걸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길 관리를 잘하고 있다. 수시로 물을 뿌리고 흙을 보충하고 평탄하게 다듬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기에 이렇게 좋은 길이 보존되는 것이리라. 맨발에 닿는 흙의 촉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심호흡으로 상큼한 공기를 깊이 흡입했다. 세족장에서 발을 씻고 에어건으로 발을 말렸다. 이런 시설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문경새재 하행길은 맨발걷기하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문경새재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수단으로서의 길이 아니다. 수단으로서의 길은 이미 자동차가 점령해 버린 지 오래되었다. 문경새재는 그 자체가 목적지요 목적이다. 문경새재는 걸으면서 생각하는 사색이 목적이요, 걸으면서 좌우에 펼쳐진 태고의 풍광을 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렇게 건강한 아름다움을 모두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문경새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2025 0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