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퇴직 일기(8)

by 인문학 이야기꾼

목사님으로부터 7월 첫 금요 예배 때 설교 말씀 부탁한다는 카톡을 받았다. 오발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와 인연을 맺은 지는 30여 년이 되었지만 성경 지식이나 믿음의 강도는 그리 강하지 않았기에 나에게 설교 말씀을 부탁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확인해 보니 오발송이 아니라 연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종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설교’를 한다는 생각보다 일정한 주제로 청중 앞에서 이야기하는 ‘강연’을 한다는 기분으로 받아들였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는 잠언 16장 24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평소 말의 힘에 대해, 말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왔던 터라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라고 주제를 정했다. 이 주제를 문학 작품과 연관지어 풀어나가기로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바보 빅터(호아킴 데 포사다)』가 있다. 주인공 빅터는 어릴 때부터 말이 어눌하고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따돌림을 받아왔다. 중학교 2학년 때 IQ 검사를 했는데 173이 나왔다. 담당 교사는 학적부에 73이라고 적었다. 담당 교사의 잠재의식 속에 빅터는 어눌하고 엉뚱한 학생이었기에 173을 보고도 아무 거리낌 없이 73을 적었을 것이다. 담당 교사는 IQ 173의 천재를 IQ 73의 바보로 만든 것이었다. 담당 교사의 실수로 발설된 IQ 73은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빅터는 돌고래라는 별명과 함께 조롱당하고 따돌림당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퇴하고 만다. 빅터는 취업을 하기도 하지만 ‘돌고래, 바보’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곧바로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취업과 퇴직의 삶이 반복되는 것과 더불어 빅터의 자존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IQ가 73이 아니라 173이라는 사실을 알고, 학교 때 그나마 가깝게 지냈던 친구와 함께 담당 교사를 찾아가 왜 그랬냐고 물었지만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빅터는 자신이 바보로 산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이라고 이야기한다. “난 바보가 맞았어. 그동안 숫자에 속았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속았고, 세상에 속았다. 난 정말 바보였어. 스스로를 믿지 못한 진짜 바보였어.”

물론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는 빅터의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천재를 바보로 만든 것은 담당 교사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개인에 대한 악한 말 한마디가 천재를 바보로 만들고 그 개인의 삶을 17년 동안이나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지만, 악한 말은 독버섯 같아서 몸과 마음도 황량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 말이 어눌한 사람도 있고, 나보다 공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도 있고, 나보다 돈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거나 소외시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잠언 16장 24절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아니 어쩌면 이들에게 들려주는 선한 말 한마디가 이들을 나보다 나은 위치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 잠언의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유정 작가의 <동백꽃>이라는 1930년대 소설이 있다. 마름의 딸인 ‘점순이’와 소작인의 아들인 ‘나’는 열일곱 살 동갑이지만, 사랑에 눈을 뜬 점순이에 비해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다. 어느 날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점순이가 ‘느 집에 이거 없지’ 하면서 구운 감자 세 개를 불쑥 내민다. 감자를 받아먹고 싶었지만, 흙수저라고 무시하는 것 같아 ‘나’는 ‘너나 먹어라’하며 감자를 받지 않았다. 점순이가 준 것은 감자이지만 그 안에 점순이의 ‘사랑’이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데, 그것을 거절당했으니 자존심이 상한 점순이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뛰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점순이는 왜 ‘느 집에 이거 없지?’라고 말해 흙수저 처지인 ‘나’의 상처를 건드렸는가? 점순이가 귀한 감자를 ‘나’에게 준 상황이나, ‘나’가 감자를 받지 않았을 때 눈물까지 글썽이는 점순이의 행동으로 보아 점순이가 ‘나’를 무시하는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점순이는 아마 그렇게 말해도 ‘나’가 자기의 의도를 잘 알아 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 ‘허구적 합의 효과’라고 한다. 이는 상대방이 자기의 생각을 잘 알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점순이가 ‘허구적 합의 효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봄 감자 먹어보니 너무 맛있었어. 맛있는 거 먹고 있으니 네 생각이 났어. 네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 먹어봐.’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점순이의 말은 ‘꿀송이’가 되어 서로의 마음과 몸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상욱 작가의 『시로』라는 시집이 있다. 짧은 시의 형식으로, 일상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말들을 유머와 위트로 재창조한 시집이라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시를 통해 소확행을 누릴 수 책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 책에 보면,


너는 충고를 기분 나쁘게 듣더라

너는 기분 나쁘게 충고를 하더라


라는 시가 있다. 충고는 남의 결점이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고를 하는 사람은 좋은 뜻으로 하더라도 충고를 받는 사람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시집에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넌 왜 그래?

넌 왜 좋은 뜻을 그런 식으로 말해?


‘너 왜 맨날 지각해? 학생 때 지각하면 커서도 지각하고 큰일 못하니까 지금부터 지각 버릇 좀 고쳐’라고 한다면 말하는 사람은 좋은 뜻으로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쪽은 어쩌다 한 번 지각한 것 가지고 어른이 되었을 때의 생활 태도까지 규정해 버리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런 말은 선한 말이 아니라 악한 말이 되어 듣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독이 되기 십상이다.

‘엄친아’라는 말이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엄마 친구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뭐도 잘하고, 뭐도 잘한다.’라고 한다면 아이는 엄마의 말에 자극받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말에 상처받고 엄마한테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평생을 부족한 사람으로 살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선한 말은 꿀송이 같다’는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아이들에게 선한 말을 하기를 성경은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인 시인은 <나를 키우는 말>이라는 시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른다’고 했다. 또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진다’고 했다. 그렇다. 좋은 말은 나를 좋은 방향으로 키우고 나쁜 말은 나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는 사람까지도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고, 악한 말은 독버섯 같은데 굳이 악한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충고랍시고 상대방의 결점을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의 장점을 찾아 그 장점으로 위로해주고 칭찬해주는 것이 서로에게 꿀송이가 된다는 가르침을 잠언을 통해 배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문경새재를 걸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