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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제1구간(주천~운봉)

by 인문학 이야기꾼

언제나 걷기 좋고 산행하기 좋은 곳을 찾아, 걷는 것을 기치로 내건 ‘길사랑 어울마당’이란 카페(부산)가 있다. 이 카페에 지리산 둘레길 걷기에 관한 공지가 떴다. 지리산은 역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자연 경관으로도 관심이 많은 곳이라 꼭 완주하고 싶은 마음에 참가 신청을 하려고 하니 벌써 마감되었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기자 명단에, 오래 함께 산행을 한 ‘윤죽회’ 식구 세 사람을 함께 올려놓았다. 대기자가 많아 차량 1대를 증차하여 38명이 함께 가기로 해, 좋은 여행 겸 산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침 8시 우리 일행은 가을 냄새 가득한 복장보다 더 짙은 지리산 둘레길의 정취를 가슴에 담기 위해 동래전철역에 모였다. 낯선 얼굴이 대부분이었지만 지리산 둘레길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25인승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독지가가 제공한 떡 두 개를 받고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다.

10시 50분 지리산 둘레길 남원 주천안내센터에 도착했다. 예보대로 약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단 배낭에 커버를 씌웠다. 우의와 우산은 다 준비했으나 산행대장인 표기사님은 우산 쓰기를 권했다. 오늘 하루는 자연에 동화되기 위해 이 길을 걷기로 했으니 비에 좀 젖으면 어떠랴 싶었다. 비도 자연의 일부이니 비에 젖는 것도 자연에 동화되는 길이라 생각하니 비가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36명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주천에서 운봉까지 제1구간 시작점을 통과했다. 앙증맞은 감나무가 붉게 익은 감을 앙증맞게 달고 길섶에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실개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고 지리산 둘레권역 홍보관을 지나 내송마을로 들어섰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비를 맞아 무거운 머리를 더욱 숙이고 있었고, 내리는 비에 머리를 감은 배추는 싱싱한 젊음을 뽐내고 있었다. ‘내송(內松)’이라는 이름은 ‘안쪽에 있는 소나무 마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명으로 보아 예로부터 이 마을 뒷산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내송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니 소나무도 많았지만 소나무 사이사이로 활엽수와 관목들과 풀잎들이 비에 젖어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산속으로 조금 들어가니 ‘개미정지’라는 곳이 나온다. ‘정지’는 몇몇 뜻이 있지만, ‘정지(停地)’로 본다면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추어 쉬어가는 곳’의 의미가 된다. 부지런한 개미도 쉬어가야 될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걸어가는 길손들에게 잠시 쉬어가라는 의미가 지명에 묻어 있다. 내송마을 출신의 의병장 조경남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다 여기서 잠이 들었는데 개미들이 장군의 발을 물어뜯어 위급함을 알렸다고 하여 ‘개미정지’라는 이름이 명명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무로 만든 개미 모형이 설화 속 자신의 역할마저 숨기려는 듯, 풀 속에 자신의 몸을 반쯤은 숨기고 있었다.

개미정지를 지나니 가파른 길이 운무 속으로 아스라이 이어져 있다. 비는 그쳤지만 땀은 쉴 새 없이 흐른다. 비가 그친 틈에 점심을 먹고 가자는 산행대장의 명령(?)이 반갑게 전달되었다. 삼삼오오 오솔길 가장자리에 모여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후식까지 먹었다. 꿀맛이었다. 땀 식기 전에 이동을 서둘렀다. 지리산 둘레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 구간은 걷기에 정말 좋은 길이다. 다양한 숲의 환경이 좋고, 산행의 맛을 더할 수 있는 조붓하면서도 적절한 경사도의 산길에 역사적, 문화적 이야깃거리가 있어 더욱 좋다. 길 좌우로 솟아있는 나무들과 다소곳이 앉아 있는 바위들, 길섶에서 싱그럽게 속삭이듯 살랑이는 풀들이 이 길을 다녔을 수많은 사람들의 길벗이 되어주었으리라.

구룡치에 도착했다. 시작점에서 3.6km 왔고, 도착점까지는 11.3km 남았다고 벅수 모양의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가 말하고 있다. 이정표의 붉은색 화살표는 순방향(시계 방향)으로 걷는다는 표시를, 검은색 화살표는 역방향으로 걷는다는 표시를 나타낸다. 구룡치의 ‘구룡(九龍)’은 아홉 마리 용을 뜻하고, ‘치(峙)’는 높은 산의 고개나 산등성이를 말한다. 그러니 ‘구룡치’는 아홉 마리의 용의 형상을 한 고개를 뜻한다. 아마 아홉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는 형세를 지녔으리라는 상상력이 구룡치라는 지명을 만들었을 것이다. ‘구룡포, 구룡산, 구룡계곡, 구룡령, 곰치, 말치’ 등, 우리나라 지명에 ‘구룡’이 들어가는 지명도 많고, ‘치’가 들어가는 지명도 많다. 신화적 상상력에 지형적 특성이 더해져 만들어진 지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작점부터 구룡치까지는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의 1/4지점이지만, 힘듦으로 본다면 1/2 이상은 온 셈이다. 구룡치부터는 아주 완만한 내리막과 평지가 이어진다. 비가 왔지만 오솔길은 미끄럽지 않다. 이른 낙엽이 흙길을 덮어, 가는 길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낙엽만으로 미끄럼을 방지하기 어려울 만한 곳에는 야자수 매트를 깔아놓았다. 이렇게 가파른 오솔길에 그렇게 무거운 야자수 매트를 어떻게 운반했는지 운반한 사람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야자수 매트는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토양 침식을 막기도 하고, 자연 분해되면서 주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방방곡곡에 많이 깔아두었다.

산길이지만 평지로 접어드니 산행 속도가 빨라졌다. 후미에서 걷는 우리도 속도를 내어 걷는데 선두에 있어야 할 산행대장이 보였다. 산행대장은 망태버섯 앞에 서서 일행들에게 이것이 ‘망태버섯’이라고 설명해 준다. 망태를 뒤집어씌운 것 같은 버섯이 앙증맞게 길섶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란 그물 모양의 치마를 온몸에 두르고 목만 내놓은 모습은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인공이 가미된 것처럼 느껴졌다. 비를 맞아 더욱 붉어진 홍송을 바라보며 발걸음도 가볍게 앞선 일행을 뒤쫓았다.

조금 가니 용소나무 근처에서 일행이 쉬고 있었다. 용이 소나무를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지녔다고 ‘용소나무’라 명명한 듯했다.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나무를 ‘연리지(連理枝)’라 하는데, 이는 지극한 사랑의 결과 하나가 되었다고 보기에 이 나무를 ‘사랑소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쓴 <장한가(長恨歌)>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기를 원하네’라고 표현했다. ‘비익조(比翼鳥)’는 날개와 눈이 하나씩이라 암수가 함께해야만 날 수 있는 새로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연리지, 비익조와 같은 사랑이 온 누리에 가득하길 바라면서 갈 길을 서둘렀다.

산을 내려오니 아스팔트 길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지금부터는 산길보다 마을길이 대부분이다. 아스팔트 차도를 인도 삼아 조금 걸어가니 회덕마을이 나타난다. ‘회덕(會德)’은 ‘덕(德)을 한 곳에 모은다(會)’는 뜻을 담고 있다.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 등 여러 산의 덕을 한 곳에 모아 이룬 마을이라는 풍수지리적 의미도 전해진다. 농로(農路)를 따라 노치마을을 향해 걸었다. 농로 좌우의 논에는 올벼를 심어 벌써 추수가 끝났다. 벼를 벤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고온다습의 기후 조건만 맞으면 저 새싹이 벼 이삭을 피울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일행은 노치마을에 도착했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의 줄기가 지나가는 마을로 유명하다. ‘노치마을’은 마을 주변 산줄기의 높은 곳에 갈대가 많아 ‘갈재(갈대 고개)’라고 불리던 것을 한자로 ‘갈대 로(蘆)’로 표기하여 ‘노치(蘆峙)’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노치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백두대간의 줄기에 쇠말뚝을 박거나 목돌(목 조임돌)을 묻었다고 하는데, 그 목돌이 발견되어 지금은 당산나무 옆 유리 케이스에 목돌을 전시하여 일제의 만행과 악행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표본으로 삼고 있다. 당산나무 옆의 호랑이 두 마리와 당산나무가 일제의 만행을 준엄하게 꾸짖는 듯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노치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의 중간 지점쯤 된다.

노치마을에서 가장마을로 가는 오솔길 우측으로 덕산저수지가 비에 젖어 한적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덕산저수지를 끼고 논길을 걸어가는데 ‘질매재’가 앞길을 막아선다. ‘질매’는 소의 등에 얹어 짐을 싣고 운반하는 데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도구를 말한다. ‘재’는 고개를 의미하니, ‘질매재’는 소에 질매를 얹고 질매에 짐을 싣고 넘나들던 고개를 뜻하기도 하고, 고개의 모양이 질매의 모양처럼 생긴 고개를 뜻하기도 한다. 실제로 질매재를 올라보니 힘들기보다 소나무 우거진 솔숲의 쾌적함이 온몸을 감싼다. 넓게 자리한 풍요로운 운봉의 들판이 낮게 드리워진 구름과 맞닿을 정도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소나무 사이로 보인다.

덕산저수지를 돌아 질매재를 넘어 내려오니 ‘심수정(心修亭)’이란 정자가 우리 일행에게 쉼을 제공해 준다. ‘심수정(心修亭)’은 ‘마음이 닦이는 정자’라는 뜻이다. 덕산저수지를 바라보고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닦인다는 의미로 ‘심수정’이라 명명한 듯하다. 유교적 덕목의 ‘수신(修身)’을 중시하면 ‘마음을 닦는 정자’로 읽을 수도 있다. 일행이 많아 정자에 다 올라갈 수 없었으나 일행 중 한 분이 사과를 잘라 한 조각씩 나누어준다. 정자에 올라 마음을 닦는 것보다 사과 한 쪽이 마음을 더 환하게 닦아주는 것 같다.

사과 한 쪽과 물 한 모금으로 에너지를 얻어 숲길을 내려오니 가장마을이 나타난다. 가장(佳粧)은 ‘선녀가 화장을 한 것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장마을을 지나 너른 들판 사이로 난 농로를 걸으며 들판의 풍요로움이 농부들의 일상적 삶의 여유와 풍요로움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하면서 행정마을로 들어섰다.


행정(杏亭)마을의 지명은 살구나무[杏]와 정자[亭]가 유명해서 명명된 듯하다. 그러나 행정마을은 살구나무보다 서어나무가 유명하다. 행정마을에 조성된 서어나무 숲은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그 경관이 뛰어나다. 서어나무 숲은 약 200년 전 마을의 허한 기운을 채우고 액운을 막아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숲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서어나무 숲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행정마을을 지나 우리의 목적지인 운봉읍으로 가는 둑길은 오래된 벚나무와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조성되어 있다. 그 가로수들의 호쾌한 호위를 받으며 우리 일행은 몸은 무겁지만 발길은 가볍게 걸어간다. 둑길 오른쪽 아래로 양묘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양묘장은 나무의 묘목을 키우는 곳으로 조경이나 산림 복구에 필요한 나무를 길러내는 곳이다. 묘목이라 수종을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소나무나 편백나무 등 침엽수 계열로 보인다. 묘목들이 반쯤 열린 비닐하우스에서 머리를 내밀고 밝게 자라고 있었다. 양묘장을 끝으로 지리산 둘레길 1구간 걷기가 끝났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종점에 도착했다. 5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는 등 개인 정비를 끝내고, 저녁을 먹기 위해 ‘운봉 흑돼지 전문점’으로 향했다. 걷고, 보고, 생각하고, 대화하느라 소진된 에너지를 돼지고기에 상추쌈으로, 된장찌개에 공기밥으로 보충했다. 고기도 된장찌개도 맛있었다. 특히 상추 인심이 후했다. 18시에 부산으로 출발하여 20시 30분쯤에 동래전철역 도착했다. 집에 오니 만보기에 3만보가 찍혔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피곤보다 뿌듯함이 가득한 하루였다. 그 뿌듯함이 10월의 지리산 둘레길 걷기를 기대케 했다. 좋은 길을 안내해 준 산행대장과 오늘 둘레길 걷기에 여러모로 애쓰신 분들께 글로나마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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