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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제4구간(금계~동강)

by 인문학 이야기꾼

아침 6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어둑어둑한 공기가 시간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발걸음은 초등학생의 소풍길처럼 가볍고 상쾌했다. 지리산 둘레길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번 지리산 둘레길 걷기는 순차적으로 보면 제2구간을 걸어야 하지만 가을에 걷기 좋은 구간이라 제4구간(금계~동강)으로 조정해 걷는다고 한다. 제4구간은 총거리 12.7km로 5시간 소요되며, 지리산 둘레길 기준 난이도는 힘든 구간이라지만, 지난번 제1구간의 걷기의 감동이 있어 이번에도 주저 없이 신청했었다. 이번에 함께 걷게 된 회원은 총 27명이다. 27명이 25인승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아침 7시 동래전철역에서 출발했다.

버스는 우리를 ‘지안재’ 마루에 잠시 내려주었다. 지안재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왜 이 길이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 뒤로 마을을 이루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앞에는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넉넉하게 해 주는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마을 뒤에는 지리산 자락의 능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마을 뒷마당까지 내려와 앉아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안재’의 한자 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잠시 멈추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개’라는 뜻의 ‘지안재[止安峙(지안치)]’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시 금계마을 지리산 둘레길 함양군 안내센터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천초등학교 의탄분교였는데,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1999년에 폐교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지리산 둘레길을 탐방하는 길손들에게 안내소와 주차장으로 그 소임을 감당하고 있다.

‘금계마을’은 한국전쟁 전후로 빨치산 활동의 중심지였던 지리산 입구에 위치했기 때문에 국군과 빨치산의 충돌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금계마을의 일부 주민들은 빨치산으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되거나, 빨치산의 보복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의 피해자가 되어 오랫동안 침묵과 고통으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 아픔의 역사를 극복하고 지금은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평온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금빛 닭을 많이 길러서 금계(金鷄)마을인지, 마을 뒷산의 지형이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금계(金鷄)마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에 걸맞게 마을은 금빛으로 빛나는 듯했다.

금계마을 앞에는 맑은 소리를 내며 냇물이 흘러간다. 금빛 냇물을 지닌 마을이라 ‘금계(金溪)마을’이라 해도 제격일 듯싶었다. 그 냇물을 가로질러 콘크리트 다리가 ‘의탄교’라는 명찰을 달고 서 있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넓이이지만 이 냇물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문명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도 문명의 도움을 받아 ‘의탄교’를 건넜다. ‘의탄(義灘)’은 ‘의로운 여울’이란 뜻이다. 의탄리(義灘里)라는 이곳 지명을 따서 교량 이름으로 삼은 듯했다. 의탄리는 고려 유신인 아무개가 이곳에 앉아 망국의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여울이 되어 흐른다는 전설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지명이다. 의탄교 아래를 흐르는 냇물은 ‘임천(臨川)’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임천은 용유담(龍遊潭)을 지나면서 ‘엄천(嚴川)’으로 불린다. 엄천은 여러 물길을 받아들여 경호강으로, 남강으로 이어진다.

의탄교를 건너니 의평마을이 우리를 반긴다. 의평(義坪)은 이 마을이 속한 ‘의탄리’에서 ‘의’를 따고, 강변의 평평한 지형을 나타내기 위해 ‘평’을 따온 듯싶었다. 이 마을에는 600년 넘은 느티나무가 보호수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있었는데, 매년 음력 정월에 풍년과 마을의 평온을 비는 당산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당산제는 버려야 할 미신이 아니라 공동체 문화로 전승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평마을을 지나 포장도로를 조금 걸어가니 오른쪽 산으로 올라가라고 벅수 모양의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가 손짓하고 있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의중마을’이 나타난다. 의평마을이 평평한 곳에 위치했다면 의중마을을 조금 올라온, 중간 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중말[義仲]’이라고 한단다. 의중마을에서 용유담(모전마을)까지는 바로 가는 코스가 있고,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경유하는 코스가 있는데, 의중마을 벅수 이정표가 화살표로 그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의중마을에서 서암정사, 벽송사 방향으로 가기 위해 산으로 들어섰다. 좁은 산길을 따라 한 줄로 서서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이자 오솔길이었다. 산솔길이라 이름을 지어보았다. 산솔길 좌우에는 교목과 관목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저마다의 색깔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10월 말이지만 나무들은 싱싱한 젊음으로 아직 단풍의 때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산솔길 저만큼 아래에서는 칠선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제법 세찬 계곡물 소리로 산길의 정취를 더해준다.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의 난이도를 ‘상’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바로 이 길의 가파름 때문인 듯싶었다. 약초꾼과 나무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랐을 이 길을 지금 우리는 탐방이란 이름으로 오르고 있지만, 삶의 방편으로 이 길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힘겨웠을 삶에 공감하면서 올랐다.


11시, 금계마을을 출발한 지 거의 한 시간 만에 서암정사(瑞庵精舍)에 도착했다. ‘서암정사’는 자연 속에서 불도를 닦는 수행처로 알려져 있다. 사찰 입구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바위를 파서 그 안에 사천왕상을 새겨 마치 바위 안에 사천왕을 모셔 놓은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외부의 비바람으로부터 사천왕을 보호하려는 뜻과 함께 신성한 느낌을 주려는 뜻으로 읽혔다.

서암정사의 백미는 자연 암반을 파서 만든 ‘석굴법당’이다. 석굴법당은 원응 스님이 한국전쟁 때 희생된 원혼들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1989년부터 10여 년간 자연 암반을 파고 다듬어 완성했다고 한다. 본존불과 협시불의 위치, 기둥과 벽, 그리고 거기에 새길 불상들을 미리 설계하고 바위를 파서 인공 동굴을 만들었을 것이다. 바위에 불상을 새길 때 한치만 어긋나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에 극한의 정신으로 수많은 부처를 정교하게 마애(磨崖)한 석공들의 장인정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서암정사를 나서 넓게 포장된 찻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벽송사(碧松寺)’라는 사찰이 우리를 반긴다. 찻길이 없었다면 벽송사를 찾는 불자나 길손들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함께 이 길을 걷는 찬샘님이 귀띔해 준다. 벽송사 한적한 공간을 찾아 삼삼오오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 온 점심을 먹었다. 과일에 커피까지 마시고 벽송사를 탐방했다.

벽송사(碧松寺) 일대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국군과 빨치산 간의 치열한 전투 장소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폐허가 된 사찰은 1960년대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벽송사 입구 양쪽에 사천왕상을 대신하는 한 쌍의 나무 장승이 서 있었다. 서암정사의 사천왕상을 돌로, 벽송사의 사천왕상은 나무로 조성했다. 사찰 뒤쪽에 크고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와 늘씬하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우람하고 요염한 자태로 서 있었다. 이 소나무를 도인송과 미인송으로 명명해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낸 것은 후대 호사가들의 일이었으리라.

12시 30분, 용유담을 향해 벽송사 뒷산을 올랐다. 푸른 소나무가 저마다의 공간을 차지하고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푸른 소나무의 기운을 받아 ‘벽송사(碧松寺)’라는 사찰 이름을 지은 듯도 싶었다. 가파른 산길을 30여 분 올랐다. 산등성이에는 길손들의 편의를 위해 야자나무 매트를 깔아놓았다. 그 길을 따라오니 용유담까지 2.6km 남았다고 이정표가 화살표로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내려가는 길이다. 위험한 구간에는 나무 계단도 있었지만 돌길이 대부분이었다. 생김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 돌이지만 이렇게 제 위치를 찾으니 견고한 길이 된다. 돌길이 저절로 견고한 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흔들거리고 때로는 삐걱거리고 했을 터인데, 그 흔들림과 삐걱거림을 누군가 크고 작은 쐐기돌을 끼워 견고하게 만들었으리라. 그 견고함이 산길이 되고 둘레길이 되어 길손들의 안전과 낭만을 만들었을 것이다.

거의 한 시간을 내려와 용유담에 도착했다. ‘용이 놀았다는 연못’의 뜻을 지닌 용유담(龍遊潭)을 보기 위해 진행 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으로 가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용유담은 연못이 아니라 ‘임천’이란 하천의 물이 소(沼)를 이룬 곳이었다. 웅덩이 모양의 하천 주위에 너럭바위들이 있어 용 몇 마리는 너끈히 놀 수 있을 듯싶었다. ‘임천(임천강)’이란 이름의 물줄기는 용유담을 지나면서 ‘엄천(엄천강)’으로 불리게 된다.

용유담이 있는 이곳은 모전마을이다. 모전(茅田)’은 띠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산골이었던 이곳은 쌀농사를 지어야 나오는 짚보다는 지천에 널려 있는 띠(풀)이 많아 짚으로 엮은 이엉보다 띠(풀)로 엮은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기에 모전마을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모전마을에서 세동마을까지 길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다. 차와 사람이 공유하는 길이지만 차는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간다. 길 오른쪽에는 지리산 자락의 나무들의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청정하게 들리고, 길 왼쪽에는 엄천강 바위 사이를 흐르는 세찬 물소리가 더위를 앗아간다.

세동(細洞)마을의 옛 이름은 샛골(작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었으리라. 이를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작은 마을’의 의미로 ‘세동마을’로 명명한 듯싶었다. 이 마을을 또 송전(松田)마을로도 불린다. 소나무가 밭을 이룰 정도로 많아 송전마을로 불렸을 것이다. 이 마을은 한때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한 닥종이(한지) 생산지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한지(韓紙)는 천년을 가고 양지(洋紙) 백년을 간다고 하는데, 양지에 밀리는 한지의 신세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새삼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세동마을을 지나 운서마을로 가기 위해 야트막한 고개를 올라서니 정자 형태의 운서마을 쉼터가 지친 우리를 맞이한다. 쉼터에 앉아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운서마을로 내려간 길손들이 많았으리라. 쉼터에서 바라본 운서마을은 마을은 좁고 산이 넓은 전형적인 산골 마을로 보였다. 운서마을은 높은 산으로 인해 해가 일찍 졌을 것이다. 서쪽 산으로 해가 질 무렵 노을에 젖은 구름이 아름다워 ‘운서(雲西)마을’로 명명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운서마을을 지나니 다시 야트막한 고개로 이어진다. 고갯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고갯길을 오르며 보니 왼쪽으로 다랑논이 펼쳐져 있었다. 경사가 심한 산비탈을 깎아 좁고 긴 논을 계단식으로 만든 것이 다랑논이다. 산이 대부분인 마을에 쌀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논이 있어야 하고, 논을 일구기 위해 산을 깎고, 돌과 흙으로 축대를 쌓아 논을 일구었으리라. 다랑논 맨 위에는 예상대로 저수지가 있었다. 농부들은 저수지에 저장된 물을 조금이라도 아껴가며 다랑논에 물을 공급했으리라. 추수 끝난 다랑논의 벼 그루터기에서 일 년의 농사를 마무리한 농부들의 수고를 읽으며 동강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운서마을을 지나 동강마을로 가는 길에 ‘구시락재’가 걸음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높지 않은 고개였지만 종착지에 다 와 가는 길손들이 무거워진 발걸음에 ‘구시렁거리며’ 넘었다고 ‘구시락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 다니던 사람들의 애환을 몸으로 느끼며 구시락재를 넘어 동강마을로 들어섰다.

붉게 익은 감이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일손이 부족해서인지 감나무의 감들은 더러 홍시가 된 것들도 매달고 있었다. 오동나무가 있는 강가 마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동강(桐江)마을’에 도착했다. 자세히 둘러보았으나 오동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강의 동쪽에 자리한 ‘동강(東江)마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착지에는 산행 중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에어건이 설치되어 있었다. 옷과 신발에 묻은 먼지도 털고 마음에 묻은 속세의 때도 털고 난 뒤,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랐다.

저녁은 ‘지리산 나물밥’에서 지리산 나물밥을 먹었다. 남원시 인월면 달오름길에 위치한 ‘지리산 나물밥’은 옥호(屋號)이자 메뉴 이름이기도 하다. 부부의 이름과 사진을 걸고 ‘산을 밥에, 몸에 담다’라는 구호로 정성으로 지어낸 나물밥에 떡갈비 곁들여 먹으니 하루의 피곤이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남원에서 저녁을 먹고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역사적 아픔을 딛고 평화롭고 평온한 마을을 만들어낸 주민들 삶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들의 삶이 우리네 삶과 이어져 길사랑의 현장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니 또 한번 뭉클함이 밀려왔다. 아침에 출발한 동래전철역을 거처 집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이었다. 만보기는 삼만육천 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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