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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을 오르며

-자연과 문화의 만남

by 인문학 이야기꾼

길사랑 어울마당에 경주 남산 산행 계획이 공지되었다. 이번 산행은 용장1리에서 이무기능선을 타고 고위봉, 백운재, 이영재, 금오봉을 거쳐 삼릉으로 내려오는 코스라고 했다. 산행이 목적이기는 하나 신라의 불교 유적을 직접 볼 수 있는 호사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참가 신청을 했고 남산을 오르게 되었다. 산행 리더는 표대장이다.

우리 일행 13명을 태운 승합차는 우리를 공원지킴터 앞에 내려주었다. 경주 남산은 우리나라 유일의 역사 국립공원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자연과 문화를 함께 감상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원지킴터 왼쪽 징검다리를 통해 산행을 시작했다.

1출발.jpg <공원지킴터 왼쪽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추운 날씨가 예상된다고 기상예보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길에 떨어져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과 아직 단풍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울긋불긋 산색은 늦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가정집같이 보이는 천우사를 지나는 길에 슬쩍 보고 산으로 붙었다. 이무기능선이 시작되었다.

공룡능선도 있고 코끼리능선도 있는데,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유적지인 이곳을 용능선이 아니라 ‘이무기능선’이라 명명한 것이 마뜩찮았다. 그러나 직접 능선을 올라보고 나서야 이무기능선이라는 이름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낮이의 굴곡도 있었지만,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심하게 꿈틀거리며 S자 형태로 올라가는 듯한 능선의 형상을 반영해 이무기능선이라 명명한 듯싶었다.

능선을 따라 조성된 등산로는 주로 바위로 된 ‘암릉’이었다.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구간이 있을 만큼 위험한 구간도 있었다. 그런 구간에는 위험 경고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올라오는 길이 다소 험하고 힘들었지만, 군데군데 전망대 아닌 전망대가 있어 올라온 길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추수 끝난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졌고, 마을 앞을 멈추듯 흘러가는 샛강의 수면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마을까지 내려온 작은 산들이 마을을 더욱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2마을풍경.jpg <이무기능선을 오르면서 바라본 마을은 가을 추수를 끝낸 평온한 모습이었다>

고위봉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1시간 30분쯤 걸렸다. ‘경주국립공원 고위봉’ 새긴 표지석 좌우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남산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높이나 조망이 가장 높은 지위에 있을 만하다 하여 ‘고위봉(高位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고위봉을 지나면서부터는 내리막 흙길이다. 길 위에 떨어져 있는 마른 솔잎과 활엽수의 잎들이 산행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10분쯤 내려오니 백운재가 우리를 맞이한다. ‘백운(白雲)재’는 ‘흰구름이 머무는 고개’라는 예쁜 뜻에 걸맞게 주위에 아름다운 나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우리의 정상적인 산행 코스는 백운재에서 바로 금오봉으로 길을 잡아야 했으나 우리는 가파른 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신선암과 칠불암 방향으로 향했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걸작을 보여주려는 산행 리더의 배려였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먼저 만난 불상은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新仙庵磨 崖菩薩半跏像)’이었다. 불상의 이름은 불상이 위치한 사찰, 암자, 골짜기 등을 앞에 붙이고, 불상의 형태 등을 반영한 특징을 뒤에 붙인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불상이 ‘신선암’이라는 암자 근처에 있다는 의미이고, ‘마애(磨崖)’는 자연 암벽이나 큰 바위 면에 글씨나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한다. ‘보살(菩薩)’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수행자를 의미한다. 보살이 완전히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부처가 된다. 불상을 볼 때, 부처와 보살을 구별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외형적 장식의 유무이다. 부처는 특별한 장식이 없이 단출한 모습인데 비해, 보살은 화려한 관을 쓰고 있거나, 목걸이나 귀걸이, 팔찌 등의 장식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반가(半跏)’는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 반가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불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썼고, 손에 꽃을 들고 있으며 반가부좌 자세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보살반가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위 면을 깊게 파고 돋을새김으로 입체감 있게 보살의 모습을 새겼는데, 머리 위 바위 면에 수평으로 길게 판 홈은 아마 빗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함인 듯싶었다.

3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jpg <경주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의 모습>

가파른 돌길을 조금 내려가니, 칠불암(七佛庵)이란 암자 옆 바위에 새긴 일곱 불상이 잔잔한 미소로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앞쪽의 네모난 바위의 네 면에 네 분의 부처님이, 뒤쪽의 큰 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본존불은 좌대 위에 앉은 모습으로 오른쪽 손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특별히 크게 조각해 놓았다. 온갖 번뇌와 유혹을 상징하는 마귀를 항복시키기 위해 손을 크게 조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협시보살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약병인데, 이는 병고에 시달리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상징한다. 삼존불은 독립된 돌에 부처의 모습을 조각한 석조불과 같은 입체감을 느끼게 했다.

석조불과 같은 마애불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돌들을 쪼아내어야 한다. 석공들은 설계도를 가지고 전체적인 형상과 세부적인 크기를 조각했을까? 설계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정과 망치로만 이렇게 정교하게 조각했는지 불가사의하다. 현대인이 밀가루 반죽 다루듯이 신라 석공들이 돌을 다루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듯싶었다.

4칠불암마애불상군.jpg <두 개의 바위에 일곱 분의 불상을 새긴 칠불암 마애불상군의 모습>

칠불암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굽어보면서 중생의 번뇌를 구제하려는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뒤로 하고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위에서 각자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이영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계단과 돌길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났다. 다소 가파른 구간도 있었지만, 이무기능선과 달리 걷기에 편했다. 이영재를 지나 조금 더 가 임도(林道)를 만났다. 일렬로 가던 일행이 삼삼오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금오봉을 향해 걸었다.

‘용장사곡 삼층석탑(茸長寺谷 三層石塔)’이 지척에 있었는데, 가보지 못하고 금오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아쉬웠다. 일반적으로 ‘탑(塔)’은 사찰의 중심 건물인 금당(대웅전) 앞에 위치하는 것이 정형인데,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왜 산꼭대기에 조성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용장사라는 사찰은 평지 사찰이 아니라 남산 전체를 배경으로 한 산지 사찰이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 탑을 배치해 마치 탑이 남산 전체를 굽어보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부처님의 집이다. 부처님이 높은 곳에서 중생이 사는 모습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탑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금오봉(金鰲峰)에 도착했다. ‘금오봉(金鰲峰)’은 ‘금빛 거북 봉우리’라는 뜻이다. 이곳은 분명 산인데 바다거북을 뜻하는 ‘오(鰲)’를 썼다. 경주 남산의 전체적인 형상이 동서로 길게 뻗은 두 봉우리인 ‘금오봉’과 ‘고위봉’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거북이 엎드린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금오봉(金鰲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거북은 장수, 안정을 상징하는 영물로 여겨졌기에 거북처럼 생긴 남산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굳건히 지켜준다는 믿음이 금오봉이란 이름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금오봉에서 조금 내려와 ‘바둑바위’에 도착했다. 바둑바위는 평평하고 넓은 모양으로 인해 명명되었지만,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보태질 정도로 주변의 뛰어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남산에 인접한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들판이 넉넉한 인심으로 다가왔다. 마을과 마을을 가로지르는 형산강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산행 리더는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지형 설명을 자세하게 해 주었다. 특히 형산강은 특이하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포항에 닿는다고 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꼬리가 저 멀리 산속으로 사라지는 모습도 보였다.

5바둑바위에서 본 풍경.jpg <금오봉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형산강과 경주의 모습>

바둑바위에서 상선암으로 가는 중, 아주 큰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보았다. 접근하기 어려워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독립된 돌에 불상을 만들어 뒤쪽 바위에 붙여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입체감이 뛰어났다. 그러나 독립된 돌로 만든 석조불이 아니라 바위에 새긴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다.

‘신라 석공들은 왜 산속 바위에 부처님을 새겨놓았을까? 자발적으로 새겼을까 아니면 지배층이 시켜서 마지못해 새겼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신라 사람들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산이나 바위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불교가 들어온 후 신라인들은 바위산인 남산을 부처님이 머무르는 법당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조성된 석굴에 비해 마애불은 지방의 호족이나 승려, 이름 없는 민중 석공들이 각자의 소원을 담아 조성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의견이다. 신라인들의 불교 신앙이 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남산의 마애불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바둑바위에서 상선암까지의 길은 경사가 급했다. 불규칙한 돌계단이 대부분이었다. 소나무는 산을 오르내리는 길손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계단으로 내어주었고, 관목은 자신의 몸통을 길손들에게 손잡이용으로 내어주었다. 굵지 않은 소나무 뿌리는 성인의 몸무게를 지속적으로 감당하면서도 오랜 세월 청정함으로 남산을 지키고 있었다. 계단 역할을 하는 소나무 뿌리와 손잡이 역할을 하는 관목의 몸통은 여러 사람의 발길과 손길에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급한 경삿길 중턱에 상선암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선암을 지나 내려오는 길은 돌길이었지만 길 옆의 활엽수들은 울긋불긋 단풍으로 늦가을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6하산길.jpg <제법 늦가을의 분위기를 느끼며 상선암을 지나 하산하는 모습>

상선암을 지나 내려오는 길에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三陵溪谷 石造如來坐像)’을 만났다. 일행이 앞서가는 바람에 소나무 사이로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받아 온화하게 빛나는 모습을 등산로에 서서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불상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는데, 발굴과 복원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서 길손들에게 자비의 아름다움을 베풀고 있다. 바위에 새긴 마애불과 달리 석조불은 독립된 돌을 다듬고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된 불상을 이곳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조금 내려와 불두(佛頭)가 없이 앉은 모습의 불상을 만났다. ‘삼릉계곡 무불두 석조여래좌상’이라 할 만하였다. 석조여래좌상은 몸통과 머리를 따로 조각하여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경우 결합 부위가 약하여 외부 충격으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손괴되었거나 임진왜란 등 외침을 겪으면서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근처의 ‘삼릉계곡 선각육존불’과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은 먼발치에서만 보고 앞서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하산했다.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 곳에 ‘삼릉’이 있었다. ‘릉(陵)’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의미하며, ‘총(塚)’은 왕과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나 무덤의 주인을 모를 경우의 무덤을 말하며, ‘묘(墓)’는 왕족이나 고위 관리, 일반 백성의 무덤을 의미한다. ‘삼릉’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세 분의 신라 왕의 능이다. 주변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늦가을 오후의 햇살과 어우러져 삼릉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무덤은 소나무 숲과 햇살의 호위를 받아 쓸쓸함보다는 밝고 아늑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발산했다. 그 분위기를 간직하며 삼릉탐방지원센터 앞에 도착했다. 오후 3시 30분이었다.

7삼릉 소나무.jpg <소나무 숲은 오후의 햇살과 어우러져 삼릉을 포근하게 품었다>

경주 남산 산행은 마무리되었지만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은행나무를 감상하자며 우리 일행은 ‘도리마을’로 향했다. 노란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갔지만 은행나무는 잎들을 하나도 달고 있지 않았다.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훑은 듯 은행나무는 앙상한 뼈대만을 보여주었다. 좌판에 농산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는 그저께 바람에 은행잎이 싹 다 떨어졌다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도리마을을 찾은 우리는 늦가을 저녁의 스산함을 느꼈지만, 은행나무는 바람의 도움으로 잎들을 떨어뜨리며 자신의 겨울나기 준비를 마쳤다. 어쩌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은행나무는 뭇 벌레들의 포근한 겨울 보금자리를 제공할 요량으로 자신의 잎들을 매몰차게 떨어뜨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8도리마을 은행.jpg <덤으로 찾아간 도리마을의 은행나무들은 벌써 겨울나기 준비를 마쳤다>

이번 경주 남산 산행은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을 여행한 산행이면서 탐방이었다. 발로는 산길을 오르내리며 자연과 하나 되는 체험을 했으며, 눈과 마음으로는 옛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불상을 보면서 문화적 교감을 나누었다. 이렇게 좋은 산행을 기획한 표대장과 산행을 동행한 일행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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