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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제3구간, 인월~금계)

by 인문학 이야기꾼

2025년 11월 23일 아침 6시 30분 집을 나섰다. 아침이 아니라 새벽이었다. 지난달과 달리 어둠이 아침을 지배하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새벽의 어둠과 새벽의 공기로 실감할 수 있었다. 깊을 대로 깊은 가을의 정취를 지리산 자락에서 느껴보고 싶은 들뜬 마음은 새벽의 어둠과 새벽의 공기를 밝고 맑게 만들었다. 이번 지리산 둘레길 걷기는 제3구간(인월~금계) 20.5km로 제법 긴 구간이다.

우리 일행 23명을 태운 버스는 오전 7시 동래전철역을 출발했다. 산청휴게소를 지나자 옆자리에 앉은 일행이 삶은 고구마 하나를 준다. 맛있게 먹고 나니 앞에 앉은 일행은 에너지를 보충하라며 에너지바를 준다. 떡이 전달되고 당근이 통째로 전달되었다. 버스는 정과 인심을 싣고 달려 9시 40분에 이번 둘레길 걷기의 출발점인 ‘인월(引月)마을’에 도착했다.

남원시 인월면에 위치한 인월마을은 지리산 둘레길의 가장 북단에 해당한다. 인월은 장터로 번성했던 고장으로 현재도 5일장(매월 3일, 8일)이 서고 있다. 지금은 둘레길 안내센터, 식당, 숙소 등이 있어 지리산 둘레길 2구간 도착지와 3구간 출발지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인월(引月)’은 ‘달을 끌어들이다’라는 뜻으로 예부터, ‘달이 밝은 고을’, ‘달빛 고을’로 불렸다고 하는데, 달이 뜬 밤에 이곳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구인월교’를 건너는 것으로 이번 둘레길 걷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일행은 지리산 자락의 좋은 풍경을 눈에 담고, 늦가을 정취에 빠져들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지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쪽빛처럼 푸른 물이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지리산 북쪽 자락의 맑은 시냇물을 원류로 해서 그런지 시냇물은 너무 맑아 쪽빛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하천을 ‘쪽 람(藍)’자를 써서 ‘람천(藍川)’이라 했던가 보다.

2둑방길.jpg <구인월교를 건너 람천을 따라 둑방길을 걷는 모습>

구인월교를 건너 람천을 왼쪽에 두고 둑방길을 따라 걸었다. 오른쪽에는 추수 끝난 빈 논에 벼 벤 그루터기만 남아 있었다. 예전에는 볏짚으로 초가지붕을 이는 이엉을 엮기도 했고, 가마니를 짜기도 했으며, 새끼를 꼬기도 했다. 볏짚을 썰어 소의 먹이로 쓰기도 했고, 마구간 바닥에 깔아 소의 이부자리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사용 후에는 거름으로 활용했다. 볏짚은 짚신이나 짚방석, 멍석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했고, 아궁이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벼농사는 볏짚만으로도 농촌의 보물창고가 아닐 수 없었다.

둑방길이 끝나자 아스팔트 길이 나타났다. 길 왼쪽으로 나무 난간을 설치해 놓아 안전하게 람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었다. 곳곳에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애쓴 흔적들이 보여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걸었다.

길은 ‘중군(中軍)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중군마을은 조선시대 지리산을 지키던 군사적 거점의 흔적을 간직한 곳으로, 중군(中軍)은 조선시대 중앙의 핵심 군사 진영을 뜻했다. 지금은 그런 역사와 자연이 만나 담벼락에 그려진 구름 모양의 벽화처럼 아늑하고 평안한 분위기를 가득 안겨주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왼쪽으로 너와집 몇 채가 보였다. 너와집은 예전에 지붕을 덮을 재료가 마땅치 않았던 산간 지방에서 굵은 소나무를 얇게 잘라 만든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통가옥이다. 귀촌한 사람들의 번듯한 양옥집이 곳곳에 들어서는 이 시대에 이곳 너와집은 지리산의 정서적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생활의 편리와 무관하게 길손에게 포근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너와집 주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3너와집.jpg <길손에게 포근함을 안겨주는 중군마을의 너와집>

중군마을의 벅수 이정표는 두 방향으로 우리의 진행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다. 하나는 포장길이고 하나는 산길이다. 우리를 이끄는 표대장은 산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편함보다는 늦가을 낭만을 선사하려는 리더의 배려로 보였다. 일행은 산길로 접어드는 오르막 초입에서 외투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간편한 차림으로 우리 일행은 산길로 들어섰다. 낙엽이 산길을 덮고 있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있어서 발에 밟히는 낙엽은 바스락거리기보다 폭신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발로는 낙엽을 밟으며 눈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단풍을 보며 가을산의 정취에 빠져 산길을 걸었다.

가을 분위기 물씬 풍기는 산속 오솔길을 따라 풍경에 취해 걷다 보니 ‘수성대’가 우리를 맞이한다. ‘수성대(水聲臺)’는 ‘물소리가 들리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 곳이다. 서너 뼘 높이의 폭포가 만들어내는 물소리는 약하게 들렸지만 마음으로는 청아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물소리를 듣는 듯했다. 산길이 좋으니 졸졸 흐르는 물소리마저 콸콸 흐르는 물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수성대를 지나 ‘배너미재’를 향해 올라가는 길 좌우에는 키 작은 대나무가 무더기로 서식하고 있었다. 일행의 후미에서 걷고 있던 ‘찬샘’형과 ‘길산’님은 저것이 산죽(山竹)이라고 하면서 산죽으로 조리(笊籬)를 만들었다고 했다. 예전에 쌀을 이는 데 썼던 조리(笊籬)와 한 해 복을 받는다고 해서 설날 새벽에 안방에 걸어놓는 복조리(福笊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배너미재’에 도착했다.

‘배너미재’는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 고개의 지형적 특성이 누워 있는 사람의 배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타당해 보였다. 이곳이 명당 자리라서 그런지, 배너미재 마루에 묘지 몇 기가 길손들의 마음속 참배를 받으며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한낮의 햇볕을 쬐고 있었다. 우리는 말끔하게 단장된 묘지 주위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배너미재 벅수 모양의 이정표는 온 길이 5.8km이고 남은 길이 14.7km라고 알리고 있다.

배너미재를 넘어온 산길은 마을길로 변해 우리를 맞이한다. 마을길은 산길의 정취 대신 다정다감함으로 우리를 반겼다. ‘장항마을’이다. 옛 지명이 ‘노루목’인 것으로 보아, 이 마을까지 내려온 산세가 노루의 목과 같이 기다란 형세를 하고 있었고, 노루목을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장항(獐項)마을’이라 했을 것이다.

4장항마을 소나무.jpg <작은 솔방울을 빽빽하게 달고 있는 우람한 덩치의 장항마을 소나무>

장항마을의 당산목인 소나무가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며 길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너무 커버린 가지가 행여나 부러질세라 철제 사다리로 가지를 받쳐두었다.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릴 욕심일까, 소나무는 덩치에 비해 아주 작은 솔방울들을 조롱조롱 많이도 매달고 있었다. 대처에서 온 듯한 손주들을 데리고 나온 할머니께 금계마을로 가는 길을 물으니, 손가락으로 저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 등구재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오후의 햇살을 감싸안은 등구재가 유난히 높아 보였다.

장항마을을 지나니 인월에서 보았던 람천이 여린 물살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람천의 물은 바닥의 돌을 만나 몸을 뒤집어 하얀 배를 드러내며 깔깔거리다가 폭이 넓은 곳에서는 얌전한 물결이 되어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더 큰 하천을 향해 쉼 없이 흘러간다. 람천을 가로지르는 교각은 ‘장항교’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장항교를 건너니 아스팔트 길이 우리를 막아선다. 차량과의 만남이 반갑지 않은 곳이었다. 길손들의 안전을 위한 신호등, 갓길 펜스 등의 장치가 필요해 보였다.

짧은 아스팔트 길을 지나 매동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마을길로 들어섰다. 배추를 수확하는 농부의 바쁜 손길에 유람객으로서의 미안함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피해 올라갔다. 좌우의 고사리밭에는 봄철 고사리를 꺾던 사람들의 흐뭇한 미소를 뒤로 한 채, 바싹 말라 붉은색으로 쓰러져 있는 고사리로 넘쳤다. 추수를 끝낸 사과나무도 있었지만, 이곳이 사과 농사를 하기에는 기후가 적절하지 않은지 귤 정도 크기의 사과는 수확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나무에 달려 말라 있었다.

서진암 삼거리를 지나자 들길과 산길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번갈아 나타나 길손에게 이곳이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자랑하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산길에서는 한 줄로, 들길에서는 서너 줄로 서서 행진을 계속했다. ‘황치(黃峙)’라는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황치’라는 지명은 황토색 흙길에서 유래되었거나, 해가 잘 들어 땅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직접 걸어보니 햇볕이 잘 드는 밝은 땅임은 틀림없었다. 황치의 ‘황(黃)’ 자를 딴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이 다랑논 건너편 산기슭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5다랑논.jpg <농부들의 삶의 애환을 담고 있는 상황마을의 다랑논>

황치를 넘어가면서 산마루에 제법 큰 연못에 물이 반쯤 고여 있었다. ‘길산’님이 지도를 검색하더니 ‘상황소류지(上黃小溜池)’라고 했다. 상황마을에 있는 작은 저수지라는 뜻이다. 아마 상황마을과 중황마을 사람들이 조성해 놓은 다랑논에 물을 대기 위해 파 놓은, 농부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이 요긴한 저수지였으리라. 가파른 산자락을 깎아 만든 다랑논은 길손들에게 낭만을 선사하고 있지만, 다랑논을 만들어 살 수밖에 없었던 산골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면 다랑논에 담긴 농부들의 노고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작은 연못을 지나면서 오른쪽을 바라보니 지리산의 웅장한 능선이 겹겹이 이어져 있었다. 함께 걷는 ‘찬샘’형이 지리산 천왕봉, 중봉, 써리봉을 말해 주었으나 같은 봉우리로 보였다.

상황마을에서 창원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등구재를 넘어야 하는데, 등구재 아래에 ‘등구령 쉼터’가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가기 위해 등구령 쉼터에 들어갔다. 도토리묵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씩 마시면서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막걸리를 찬조한 어느 독지가와 등구령 쉼터의 주인 아주머니를 향해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등구재를 행해 발걸음을 옮겼다. 등구재는 지리산 둘레길 전체에서도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라 낭만을 찾기에는 좀 힘들었지만 걷기에는 소문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6등구재쉼터.jpg <등구재를 넘기 위해 잠시 쉬어간 등구령 쉼터>

등구재는 ‘등구재(登龜峙)’로 표기한 데도 있고, ‘등구재(登九峙)’로 표기한 데도 있다. 등구재를 실제로 올라보니 고개가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등구재(登龜峙)가 더 와 닿았다. ‘등구재는 경남 창원마을과 전북 상황마을의 경계가 되고, 인월장 보러 가던 길, 새색시가 꽃가마 타고 넘던 길이다’라는 글귀의 빛바랜 간판이 길손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등구재를 넘어가니 우람한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산속 오솔길이 푹신한 낙엽을 바닥에 깔고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긴다. 발은 낙엽 덮인 돌길을 조심스레 디디고 걸었지만, 눈은 좌우에 펼쳐져 있는 활엽수의 단풍으로 향했다. 바람도 없는데 나무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몇 개가 곡예비행을 하며 떨어졌다. 길손들에게 단풍과 낙엽으로 가을 낭만을 선사하기 위한 배려일까?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겨우내 살아갈 보금자리로 사용하라는 배려일까? 나뭇잎은 그렇게 높은 하늘에서 이렇게 낮은 지상으로 떨어졌다. 추락이 아니라 배려라고 생각했던 탓인지, 추락마저도 즐거워 곡예비행을 했던 모양이다.

7등구재에서 하산길.jpg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등구재에서 내려가는 모습>

등구재의 산길을 내려와 마을길로 접어들자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듬뿍 받고 있는 ‘창원마을’이 지리산의 장엄한 주능선과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창원마을로 바로 내려가는 직선 길도 보였으나 우리 일행은 몇 차례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진 굽이를 돌아 창원마을에 닿았다. 창원마을의 감나무는 잎은 남김없이 떨어뜨리고 붉게 익은 감을 주렁주렁 매단 채 우리를 맞이했다. 함양군청에서는 창원마을을 ‘창고가 있는 마을(창말)’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려면 한자로 ‘창원(倉院)마을’이 되어야 하는데, 디지털함양문화대전에는 ‘창원리(昌元里)’로 표기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표기야 어떻든 창원마을은 다랑논의 애환을 숨긴 채 가을에 벚꽃을 피운 가을벚꽃과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 당산목 두 그루로 우리 일행에게 마을의 정서적 아늑함을 안겨주었다.

8창원마을.jpg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창원마을>

창원마을을 지나 ‘하늘길’이라 명명된 얕은 고개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었다. 얕은 고개였지만 마치 사방이 막혀 있어 오로지 이 길을 통해야만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길처럼 보였다. 하늘길을 올라서자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묘향대를 자주 다닌 ‘찬샘’형은 묘향대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천왕봉을 보았다며, 손가락으로 천왕봉, 중봉, 써리봉을 가리켰지만 손가락이 가리키는 정확한 지점을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지리산 봉우리들의 높낮이는 분간이 쉽지 않았다. 지리산 능선은 끊어지는 법이 없이 이어지고 이어져 백두산까지 닿았으리라.

9하늘길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jpg <하늘길을 올라서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의 모습>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는 다시 산허리를 타고 돌아야 했다. 산허리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벌써 20km를 걸어온 터라 힘에 부쳤다. 남은 힘을 다해 오르면서, 가을산을 올려도 보고 내려도 보았다. 힘겨워하는 우리 일행의 마음을 위로하듯, 아직 나무에 달려있는 단풍잎은 한 해를 보내기 아쉬운 듯 막바지 안간힘으로 붉은 입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산길을 벗어나니 금계마을의 마을길이 우리를 반긴다. 금계마을은 20.5km 걷기에 지친 우리 일행을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포근히 맞이해 주었다. 지난달에 만났던 의평마을과 의중마을이 지리산 자락의 늦가을 금빛 자태를 드러낸 채 환한 웃음으로 우리의 완주를 축하해 주는 듯했다.

저녁은 마천에서 먹었다. 담벼락에 그려진 날개 달린 돼지와 ‘마천 흑돼지촌’이라는 글씨의 앞치마를 두른 돼지가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불판에 고기를 구어 맛있게 먹었다. 땡초를 잘게 썰어 풀었는지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시락국에 밥 한그릇을 덤으로 먹으니 21km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21시 20분이었다. 만보기에는 42,000보가 찍혔다. 좋은 길을 안내해 준 산행 리더와 좋은 길을 함께 한 일행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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