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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꼬맹이의 아찔한 유혹

by 이진리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 생겨났다. 유럽에 가겠다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나는 오히려 영어 공부에 소홀했었는데 낯선 세계를 한번 경험하고 나니 영어라는 세계 공용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어 뒤늦게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한 케이스다. 내 기억 속 마지막 영어 공부는 대학 학부 때 들었던 영어 교양 강의다. 거의 10년이 넘게 영어라는 언어와 먼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유럽에 가기 전 영어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녹슨 영어에 기름칠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영어와 친숙해지는 기회도 가질 겸, 내가 가고자 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랑 얘기도 해볼 겸, 나는 외국인들이 많이 쓴다는 어플 하나를 다운받았다.


그리고 거기서 웬 꼬맹이 하나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명히 성인이긴 하지만, 내 나이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어린 스무 살짜리 녀석이니 그냥 꼬맹이라고 하겠다. 꼬맹이는 half french, half italian으로 파리에서 두 시간밖에 떨어지지 않은 룩셈부르크라는 작은 나라에 사는 아이였다.


원래 내 계획은 여행 기간 내내 파리에 있으면서 파리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었는데 내가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꼬맹이는 갑자기 룩셈부르크 홍보대사가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교통이 무료야. 작은 나라라서 하루 만에도 둘러볼 수 있어. 이 전부터도 꼬맹이는 애국자 스타일이었는데 내가 유럽에 간다고 한 순간부터 룩셈부르크 어필이 더욱 심해졌다.


그 꼬맹이와 하루가 멀다 하고 룩셈부르크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그러다 나는 이내 룩셈부르크로 가는 교통편 티켓과 호텔 예약을 마쳤다.


드디어 룩셈부크르에 가는 날이 되었다. 파리 동역-베템부르크-룩셈부르크 여정을 거쳐 나는 내가 예약한 호텔에 잘 도착했다. 배정받은 호텔룸이 싱글 침대 2개짜리여서 더블베드가 있는 룸으로 바꿔줄 수 있느냐, 호텔 측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동하는 내내 계속 그 꼬맹이와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그 꼬맹이는 어느새 내가 묵는 호텔 로비에 와 있었다. 기껏 새로 배정받은 더블룸 침대에 엉덩이 한번 대볼 새 없이 나는 곧장 로비로 내려갔다.


꼬맹이의 뒷모습, 금발에 가까운 밝은 잿빛 머리카락 색깔을 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플을 다운로드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 속에 있는 누군가가 직접 얼굴을 마주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의 목적은 파리 관련 여행의 정보를 얻는 것 그리고 영어를 조금이라도 써보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한국과 룩셈부르크. 이 엄청난 거리 차이를 넘어 만나게 된 그 꼬맹이랑 어쨌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곧장 룩셈부르크 메인 스트리트로 향했다. 메인 스트리트도 구경하고 구시가지 쪽도 구경하는 동안 꼬맹이는 정말이지, 쉬지 않고 말했다.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의 영향이 많이 받은 나라이기에 많은 국민들이 기본적으로 프랑스어를 쓰는데 프랑스어는 말이 굉장히 빠르다. 물론 말하는 속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 꼬맹이는 정말 빠르게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말했다. 다행히 나는 영어 말하기보다 영어 듣기가 훨씬 수월한 편이어서 그 빠른 말을 알아듣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아마도 그 꼬맹이는 나의 영어가 조금 미숙하다는 걸 알고 자기가 말을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라는 초월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 보는 바이다.


그리고 저녁까지 같이 먹으러 갔는데 그때 나는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꼬맹이도 마찬가지였다. 음주가무로 단련된 나라에서 온 내가 화이트 와인 두세 잔에 취할 리 없지만 스무 살 꼬맹이에게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목부터 얼굴까지 빨개져 있던 꼬맹이는 안 그래도 빠르게 하던 말을 더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꼬맹이는 갑자기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도 아까보다 빨라져서 나는 그 꼬맹이를 붙잡으려 거의 뛰다시피 한 순간도 있었다. 찬바람을 좀 맞으면 꼬맹이가 술이 좀 깰까 해서 한참 걷고 있는데 갑자기 꼬맹이가 이런 말을 했다.


"룩셈부르크 사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


당시 내 나이 서른셋. 스무 살짜리 유럽 꼬맹이의 플러팅(?)을 받을 거라 생각조차 못했기에 나는 그저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만 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고민 끝내 한 나의 대답에 갑자기 꼬맹이는 대뜸 자신의 과거 연애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전 여자 친구가 중국인이었는데 그녀는 아주 나이스했었고 자신은 한국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우선 그 꼬맹이를 달래고 달래 집으로 가는 트램을 태워 보냈다.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며 유럽 연하남의 아찔한 고백 멘트를 되새겼는데, (그 사이에도 꼬맹이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왔다. 구애의 목적이 분명한 그런 메시지들이었다) 어쨌든 그 꼬맹이도 법적으로 성인이라지만 나는 그 녀석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고 지금 내 나이에 바라는 연애와 그 꼬맹이가 바라는 연애가 굉장히 다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많은 관계가 있다. 여러 어려움을 겪어내며 관계를 이어나가는 국제 커플도 꽤 많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꼬맹이는 연신 내게 연락을 해왔지만 어쨌든 우리는 서로 각자 너무 먼 곳에 살고 있는 데다, 끈끈한 호감까지는 없었기에 관계는 곧 흐물흐물해졌다. 지금 내게 있어 그 꼬맹이는 한 개의 계정으로만 남아 있다. 메시지 어플에 추가되어 있는 한 사람. 딱 그 정도.


지금 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괜히 웃음이 난다. 유럽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화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그 꼬맹이를 떠올렸다. 이제는 스물한 살이 되었을 꼬맹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또 다른 한국인에게 룩셈부르크 호객 행위를 하며 그 한국인을 자신의 나라에 초대하려 애쓰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한국인과 정말로 연애 중일 수도 있다.


언젠가 그 꼬맹이를 또 만날 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조금 더 어른으로서 그 아이가 즐겁게 살길 바라는 마음이다. (네가 마음에 안 든 건 아니었지만 너는 너무 어렸어. 미안해. 애기야.)




KakaoTalk_20250320_162438168.jpg 그 아이와 함께 찍었던 유일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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