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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지금 여행을 가고 싶을 게 뭐람

by 이진리

지금 내 상태를 표현할 만한 여러 단어들을 고민해 봤지만 '하필'이라는 부사가 아니고서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다음 날이면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는 20대가 아니다. 그리고 서른 의 초입에 찾아온 불면증이 아직까지 내 몸에 둥지를 틀고 있는 터라 이래저래 내 몸에 관해 여러 모로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나는 '여행 병'이 도져 버렸다.


얼마 전 드디어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이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지 않는 한, 나는 올해 6월 중에 프라하에 있을 예정이다. 까를교와 마리엔 광장을 둘러보는 나 자신을 상상하면 황홀하게 즐겁지만 가끔 두려워지기도 한다. 물론 불면증 증환자로서 비행기를 타는 것도 두려움의 원인 중 하나지만, 육지에 발을 대고 있는 지금. 지금 이 순간,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치솟는 환율이다. 요즘 환율을 보면 두 눈이 번쩍 뜨인다. 환율을 보며 다짐한다. 여행 가기 전까지 절약을 일상화해야겠다고.


이 상황도 '하필'이라는 부사와 참 잘 어울린다. 하필 환율이 이 모양일 때 여행 티켓을 끊다니. 하지만 나는 지난해 9월, 파리에 다녀온 뒤 거의 매일 같이 여행 생각을 했고 이렇게 생각만 하다 시간을 보내버리는 게 아까워 항공사 할인이 열렸을 때 맞춰 얼른 티켓을 구매해 버렸다. 후회는 없다. 절약하면서 살아야지, 그런 생각만 할 뿐.


6월에 유럽 여행을 갈 거란 내 말을 들은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도 드디어 여행 병이 왔구나. 그런데 좀 늦게 오긴 했네."


불면증 환자인 나는 누구보다 '병'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사실 '여행 병'이라는 지인의 말이, 잘 생각해 보면 틀린 것도 아니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된다.


유튜브, SNS, 블로그 등등. 사람들이 자신의 소식을 기꺼이 전하려 하는 매체를 들락거리다 보면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람들의 여행 후기를 보다 보면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특히 20대에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을 보면 약간의 부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당장 너무 피곤해도, 자신의 체력을 믿고 내일을 일정을 빠듯하게 세울 수 있는 자신감. 그리고 어린 나이에 먼 나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들 또한 역시.


20대 때 나는 딱 한 번의 해외여행만 가봤다. 목적지는 미국. 한 번의 경유를 해야 도착할 수 있는, 비행기로 약 20시간이 걸려 도착한 미국에서 나는 관광을 해본 기억이 없다. 집안 행사 때문에 갔던 거라 그 행사를 돕고 잘 이행하고 오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개인 여유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변에 관광할 만한 곳도 없었다. 내가 구경할 수 있는 곳은 호텔 근처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월 마트뿐이었다.


해외여행만 여행인 건 아니다. 국내에도 숨은 명소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고,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문제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목전에 앞둔 나이. 죽었다 생각하고 1년만 불태워보자. 누군가는 문제집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 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매주 주말마다 지방으로 향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고민 끝에 문학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결정한 나는 다음 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백일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예고 학생들은 3년 내내 준비하는 입시를 대비할 시간이 나에게는 1년도 채 안 남아 있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매일매일 시집을 한 권씩 읽었고 일주일에 4편 이상의 글을 썼다.


그리고 나는 그 시기에 열리는 거의 모든 백일장에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신문사, 유명 재단에서 개최하는 백일장도 있지만 지역 축제에 곁들여하는 백일장들도 굉장히 많다. 예를 들어서 진해군항제 축제 중, 여러 세부 행사 중 그 안에 백일장이 있는 식이다.


백일장이 열리는 지역도 아주 다양하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 등. 고등학교 3학년, 열아홉 살 시기에 나는 대한민국 곳곳의 명소들을 찾아다녔다. 토요일, 일요일마다 백일장에 나갔으니 한 달에 여덟 번의 여행을 간 것이다. 공휴일에 맞춰 백일장이 열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기에, 한 달 동안 열 번 넘는 백일장 겸 여행을 다녔던 적도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못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명소들이 많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입시에 성공한 후 20대의 나는 절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해외여행에도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여기서는 다 말하지 못할 힘듦과 싸우고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하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가 지금 온 건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체력 넘치는 20대를 여행 병이 도졌다면 더 좋았을 거란, 어차피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을 곱씹다 무상해질 바에 나는 2개월 후의 내가 프라하에 있는 걸 상상하며 기뻐지는 것을 택하겠다.


불면증 환자인 나는 '여행 병'이라는 말보다 '늦바람'이라는 말을 선택하련다. 기왕 든 늦바람을 실컷 즐기며 적어도 내가 지금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곳들을(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헝가리, 전에도 갔지만 또 가고 싶은 프랑스)을 다 가보려 한다. 이번 생에 안에. 그것도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기 전까지. 그게 지금 내 '늦바람'이 추구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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