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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바오 입국 첫날 격한 환영 지진

다바오 적응기

by 글로다짓기 최주선



남아공에서의 7년 6개월의 삶.

한국에서의 3개월의 체류.

그리고,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다바오 입국 첫날.

비행기는 하늘에서 한참을 방황하다 결국 제너럴 산토스에 랜딩 했다.

세부에서 시작된 쓰나미로 인해 다바오 시티까지 6.7 정도의 강진이 왔으며, 제너럴 산토스가 어디에 붙었는지 관심도 없던 나는 재난 상황 덕분에 다바오의 더 아랫지역에 있는 섬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마닐라에서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걸리면 도착하는 비행이라 간식도 물도 사 먹어야 하는 비행기지만, 재난 상황이라며 물과 과자를 무료로 나눠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로 무섭거나 겁나지도 않았다. 예상 시간 2시간을 훌쩍 넘겨 다바오 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마중 나온 목사님 내외 분이 피해를 입었을까 염려가 됐다. 그제야 운전하고 오는 길에 땅이 흔들렸으면 어쩌나. 뉴스에서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 스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행히도 연락 끝에 안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바오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땅을 밟았다. 여름-여름-여름-여름으로 1년 내내 여름인 나라지만, 조금 선선해진 다바오의 10월이라 해도 비행으로 땡땡해진 종아리와 짊어진 짐은 몸을 더 무겁게 느껴졌다.


몇 달간 잠시 묵을 집은 3층.

중형 캐리어 8개, 이민 가방 1개, 각자 등에 배낭 하나씩 짊어지고 3층까지 올라오고 나니 팔다리가 후들거려 혼났다. 더운 날씨에 진이 다 빠져 빨리 눕고 싶지만, 이 놈의 성격 탓에 일단 짐을 정리는 해야 해서 또 부랴부랴 짐을 풀어재꼈다. 당분간이지만, 잠시라도 내 물건 좀 풀어놔야 마음이라도 빨리 안정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잠시 쉬었다가 7시쯤 만나 저녁식사 하자며 김 목사님 내외분이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오늘 저녁은 이태리식! 남아공에선 8시면 잘 준비하는 시간인데, 이미 한국에서 10시, 11시 밤도 꼴딱 새며 지냈던 이력이 있는지라, 쌩쌩한 시간이다. 맛집이라는 말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포크와 숟가락을 불끈 쥐고 두리번거렸다. 식사가 나오기 전 7시 30분경 갑자기 어지러웠다.


"어, 어지러워. 나만 그래?" "어 저도요.! "어, 나도. 식탁이 흔들려요. 어, 포크가 옆으로 가."

"어머, 여진인가 봐. 사람들 다 나가는데!"


식당 내부와 식탁이 꽤 센 강도로 흔들렸다. 식당 내부에 앉아서 식사하고 대화하던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일어나 건물 밖으로 밀고 나갔다.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우리도 같이 밖으로 나갔다. 순간, 무섭기도 하고 이 나라에 온 첫날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한 오만 생각이 교차했다.

'나, 여기서 잘 살 수 있는 거 맞지?'

이곳에서 20년, 30년간 살아온 한국 사람들도, 이 나라에 사는 이 나라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걱정 괜히 하나 싶지만 무서운 감정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프리카 최남단 남아프리카에서는 정전과 단수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지진 걱정 전혀 없이 살았는데, 다바오는 지진으로 인한 정전이 종종 있단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니.

'나 왜 이런 나라로 온 걸까?'

다엘이가 어제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다바오는 한국 사람들이 많아요?"

"아니, 별로 없다더라고. 마닐라나 카비테랑 앙헬레스 쪽에 비하면 다바오는 많이 없어졌대."

"근데 엄마 우리는 왜 항상 한국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곳으로만 가는 거예요?"

"음... 글쎄?"

낸들 알까. 그 이유를,

누구는 그런다. 내 선택 아니냐고, 내가 그렇게 선택해서 움직인 건데 왜 모르냐고.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앞으로 우리 가족에게 일어날 일들, 만날 사람들이 몹시 궁금하며,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도 꽤나 궁금하다.


너무나도 더워서 '아프리카보다 더 더워'를 입에 달고 사는 중이지만, 시간이 흘러 삼일이 지났다.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여진이 있었다. 집 안이 흔들흔들. 이내 잠잠해지는 걸 몇 번 겪고 보니 지나가는구나 싶다.

"저는 이제 한 5.6 정도 지진 오면 그냥 침대에 누워있어요. 좀 지나면 가라앉더라고요."

오전에 만난 한국 분의 말을 듣고 서로 허허 웃었지만, 앞으로 내가 그 상황을 겪게 될 거라니 웃을 일만도 아닌데 말이다.



두렵지 않다고, 걱정되지 않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씩씩하게 왔건만, 지난 삼 일간 내 마음 또한 엎치락 뒤치락이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시도 때도 없이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 자주 온다.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밖에 없다.

복잡한 시장 길, 자동차와 트라이시클, 오토바이가 얽히고설킨 도로를 보며, 내가 여기서 잘 살 수 있을지, 적응은 되어 갈지, 아이들은 학교에 잘 다닐지,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게 될지, 나는 또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고민과 궁금증이 폭발하는 역동적인 시기를 지난다.


아직 차도 못 구했고, 집도 우리 가구로 채워진 공간이 아닌 임시 거처에 있다. 안정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럼에도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이 김치를 가져다주고, 안 쓰는 그릇을 준다고 하고, 반찬이랑 몇 가지 생필품을 주고 간다. 어디 가면 뭘 살 수 있다고 알려준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돕는 손길을 보내주시고..."

매번 읊조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 순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나 또 감사의 시작이다.


아직 내 책상도 없고, 안정된 공간도 아니지만 창가에 붙여 놓은 식탁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글을 끼적인다. 너무 더워 속옷도 벗어던진 채 얇은 거즈면 잠옷을 입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이 한 마디 한다.


"그러고 앉아서 글 쓰고 있는 당신 보니 벌써 다 적응한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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