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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Jul 11. 2024

두 해커 이야기

부끄러움과 무너짐의 엇박자에 관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자괴감(自愧感)이라고 하지만, 동음 이의어인 자괴감(自壞感)은 제 스스로 무너지는 느낌을 말한다. 후자의 자괴감을 맛보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병뚜껑이 빨간 소주 1박스를 차분하게 나발 불면(?) 순식간에 경험해 볼 수 있다. 부작용이 있을망정 그나마 체험 수단으로 그리 나쁘지 않고, 깔끔하게 회생이 가능하기에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다만, 이러한 행위는 19금에 속하는지라 청소년에게만큼은 권장하지 않는다.


  지구상 어디쯤 암약하고 커도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화이트 커(White Hacker)라는 긍정의 의미로 쓰이지만, 어둠의 통로나 뒷문(Back Door)으로 살며들어와 타인의 시스템을 파괴하거나 고급정보를 도적질을 하는 험한 블랙 커(Black Hacker)도 있다. 흔히들 후자는 해커라고 부르지 않고 소위 크래커(Cracker)로 통하지만, 이들이 하는 짓거리에 따라 불러주는 칭에 불과하니 엄격히 말하자면 그분이 그놈이고, 그놈이 그 양반이다. 칼이라는 멀금한 도구 그분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그놈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양면성 때문일 것이다. 그 양반이란 어떤 사람일까? 죽였다가 살리고 살렸다가 죽이는 도덕적 경계가 애매한 경우로 판단하면 틀림없다.


  공개 소프트웨어 리눅스 배포판들 중 으뜸으로 명성이 자자한 '데비언 리눅스'(Debian Linux)를 개발한 엔지니어이자 20세기 유명한 헤커였던 이언 머독(Ian Ashley Murdock)은 42세의 젊은 나이에(2015년 12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는 흉흉한 음모가 석인 소문이 자자하건만, 아무도 누구도 그가 자살을 했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는 평소 익명(匿名)으로 개발자 전용 뉴스그룹에 종종 칼럼을 게재해 왔다. 이룩하고자 하는 몸짓과 사상과 표현이 종말점에 이르는 시점, 그때 비로소 공학자(엔지니어)는 참을 수 없는 버거운 존재의 이유를 망실하는 법이다.

  머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 그는 자신이 활동하며 개제했던 뉴스그룹의 게시물들을 점차 한 개씩 지워나갔고, 마지막 남은 하나의 게시물이 삭제되던 날 그는 세상에 종말을 고하였다. 닫힌 계에 가역반응을 취하여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독특하고 멋들어진 끝내주는(?)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사상과 철학에 스스로 바이러스를 주입하여 자연스럽게 붕괴할 수 있음이 만용이 아닌 신념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현존하는 인류 최후의 화이트 헤커로 불리는 리처드 스톨먼은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부고를 접하고 '죽어서 기쁜 건 아니지만 사라져서 기쁘다'라는 독설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여 막말을 퍼부은 장본인이다. 혹여, 이 양반이 한국인이었다면 유족으로부터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해도 쌀일이다.

  해커였던 리처드 스톨먼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의 설립자이자, 카피레프트 (Copyleft) 즉, 정품(正品)이 아닌 비품(非品)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유 소프트웨어 리처드 스톨먼이 최초 창안한 개념으로, 지적 소유(창작) 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누구나 공유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배타적 저작권의 보호를 뜻하는 카피라이트 (Copyright)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반대 개념으로 막힘없는 정보의 공유와 자유로운 정보 유통으로 누구라도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취지인 것이다. 이러한 카피레프트 운동은 최근 컨텐츠 파워의 진입 장벽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지식과 정보를 창작자가 아닌 창작자를 고용하고 있는 자본과 권력이 독점하게 되는 상황에서 더욱 부각되고 있는 정보유통 자유실천 운동다.


  2024년 현재 70대 초반인 그는 아내를 대신하는 혈액암과 더불어 소박한 여생을 보내며 평생 무자녀 독신으로 살고 있다. 가끔씩 개인이 운용하는 사이트나 뉴스그룹에 기고한 내용에서는 엉뚱하게 인구 억제의 필요성을 심심찮게 주장하곤 해왔다. 그거 그 양반 사정이니 내가 상관할 바는 없지, 지금 세상에 공개된 수많은 코드나 막강한 무료 프로그램들을 우리가 자유롭게 쓰고 있는 건 전적으로 이 양반 덕택이다.

  현재 그는 혈액암 이외 나이들면 시달리는 자잘한 노환과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유 소프트웨어 캠페인에 완장을 차고 세계 각지를 바삐 돌아다니며 세미나를 하고 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평소 이 양반의 저돌적이고 바보 같은 언행으로 미루어 도저히 자괴감(自愧感)이란 찾아볼 수 없다. 추후 빌 게이츠의 부고를 접한 스톨먼의 독설은 또 얼마나 지독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해를 더하여 나이를 먹어갈수록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자괴감(自愧感)이 드는 것은 철이 바뀌듯 자연스러운 일이건만, 이것이 변질되면 스스로 무너지는 자괴감(自壞感)으로 확장되어 드디어 자살감으 진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전무후무한 돌팔이의 견해이긴 하지만...


  사람의 행적에 관한 평가는 설계 수명이 매우 짧다. 오리지널이 아니고, 이슈에 붙어서 빈대처럼 생존하는 가리지널(?)이기 때문이다. 역시 작품은 수명이 길지만 비평은 수명이 짧은 것도 그 이유가 아닌가 싶다.

머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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