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경 Aug 28. 2024

개는 논문을 먹지 않는다

르포르타주: 교차 검증이라는 달콤한 유혹

  석유 매장량은 왜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50년 이상의 가용기간을 지닌 걸까? 내가 소년시절 그러니까 50 몇 년 이전에 담임선생님은 앞으로 석유는 50년 후에 고갈이 될 것임을 주지시켰고, 청소년시절 지구과학 선생님은 이보다 20년을 줄여 향후 30년 이내에 석유는 반드시 고갈되고야 말 것 이라며 겁박을 준 기억이 있다. 세월을 더하여 그로부터 몇십 년이 훌쩍 넘어선 시대를 살아가며 석유매장량 관련 논문 한편을 접한 나는 머리가 띵 해진 기억이 있다. 그 내용에 근거하자면 화석연료는 앞으로도 50년 이상의 가용기간의 여유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지금 당장 공중에 떠다니는 날개 달린 깡통들이 무려 수십만 대나 되고, 그보다 덩치가 큰 오대양에 떠 있는 스크류 달린 깡통들은 수백 대를 능가하며, 제동장치를 탑재하고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족히 1.5 톤이 넘는 깡통들이 무려 수십억 대인 지금, 들이 하루에 소비하화석연료의 양만 해도 어느 정도인지 정량적 계측이 가능하다.

  그러니 무슨 놈의 화석연료 자원의 매장량이 줄었다가 늘어나는 스프링이나 고무줄이 아닌 다음에야, 죄다 틀린 예측에 관한 내용들은 자못 의문이거니와 나는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궁금하지만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아부다비 대학 지구과학전공 나지하산 교수는 '석유 매장량과 신뢰성 격차'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석유 매장량의 사용 가능한 정의와 그에 따른 신뢰성 격차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격차는 논문이나 기술보고서를 집필해 본 당사자라면 익히 알고 있는 교차 검증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포함한 몇 가지의 치명적인 이슈가 있다.

  교차 검증의 시시콜콜한 오류는 매장량에 대한 일관된 정의가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석유 산업에서는 수많은 정의가 사용 가능하다. 또한 각 정의의 문맥이 모호하여 평가자가 매장량을 분류할 때 어렵지 않게 큰 폭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각 석유 회사는 특정 목표에 연관된 이상한 정의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오용은 금융과 주식시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회사의 압력으로 연구 규칙이 어긋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데이터 교환에 의사소통 개선이 필요하고, 매장량의 일관된 정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석유 매장량이 측정 가능한 양이 아니라 합리적 주장이 가능한 추정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50여 년 전에는 진보된 공법에 따라 채굴되는 샌드오일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지반에 스팀을 불어넣어 지각단층을 고문하는 기술도 없었으며, 메뚜기 대가리와(?) 흡사한 피스톤 펌프 채굴 방식에 따른 의존도가 높았다. 그래서 석유자원을 재래식과 비재래식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잔존량과 탐사, 개발 상태를 평가해야 함이 타당하고, 잔존량의 추정 또한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른 생산 경로를 제시함이 당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사의 주식가치 폭락을 우려하는 다국적 석유거대기업들의 음모와 이들이 모이처럼 함부로 던져주는 허위 데이터를 인용하여, 소비자 입맛에 맞도록 편집된 엉터리 보고서나 이들과 야합하여 작성사기성 논문 나부랭이가 유령처럼 나돌아 다니고 있음을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신뢰성있는 미국 공공기관에서 공표한 바에 따르면, 듀크대학교 한 연구원이 발표했던 39 편의 논문과 총 2억 불의 자금이 투입된 60개 이상의 프로젝트에서 트리밍(Trimming)과 쿠킹(Cooking)에 의한 데이터 위조가 발견되었다는 조사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사실에 관한 르포르타주의 집필을 오래전부터 기획하여 왔지만, 그동안 망설여 왔던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남들이 판단하기에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는 경우와 진배없고, 암암리에 쉬쉬 묵과하고 있거나 ‘이미 알려져 묻혀있는 사실들을 굳이 파헤쳐 대책 없이 벌려 놓는다는 것이 무책임하지 않을까?’ 하는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의 자기 기만은 올바른 과학기술자의 태도가 아니다. 때로는 자기 검열이 혹여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속이는 기만은 아닌지를 의심해야 한다.

카니자 삼각형: 실재의 삼각형은 어디에도 없다.

  눈의 망막과 신경세포를 통과한 사물을 우리의 두뇌가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면 인간은 카니자 삼각형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여기에 삼각형은 하나도 없지만 두 개의 삼각형이 보이는 이유는 눈의 신경세포가 보낸 감각 정보를 우리의 뇌가 지각 정보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은 실제 하지 않은 선으로 빈틈을 메우고 존재하지 않는 흰색과 반전의 삼각형을 만든다. 무의식적 표상과 추상의 지배를 받는 우리의 뇌는 이런 식으로 세계를 창조하지만 개나 고양이, 참새나 고래등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이 비록 사실일 망정 또한 그것들이 사실의 집합이라고 한들 명증한 진실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과학적 발견이라는 업적의 흐름이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추접한 사실을 차고 넘치도록 여러 가지의 사례들을 통하여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냉엄한 진실은 서글플 겨를이 없고 쓸쓸할 이유도 없다. 생명도 이성도 감정도 그 아무것도 없기에...


참조문헌

1. Naji, Hassan. 석유 매장량과 신뢰성 격차 Earth Sciences. 2007

2.  Christoph W. McGlade, Steve A. Sorrell 과거와 미래의 오일 리소스 평가, Energy Policy. 2011

3. Marshall E. 과학적 부정행위 - 사기는 얼마나 만연한가? Science. 2000

4. Sovacool BK. 과학적 부정행위 탐구. Journal of Bioethical Inquiry. 2008

작가의 이전글 과학적 위법행위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