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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Aug 30. 2024

고도(Godot)를 기다린 마지막 날의 스케치

우주는 헛것이었으나 행복했다.

  막이 오르면, 배경 조명이 칙칙하다.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 그 밖에 익숙한 출연자들은 보이지 않고, 흐린 조명아래 작업복 차림새의 누군지 알 수 없는 머시기가 객석 방향으로 등을 보인채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있다. 큼직한 서양 낫을 어께에 맨 집행관이 차분히 등장해 머시기 앞에 다가 선다.


집행관: (비아냥 거리듯) 오늘 당장 죽어도 은가?

머시기: (차분하게) 여한이 없다...

집행관: 그렇다면 내일은 어떤가?

머시기: 상관없이 행복하다.

집행관: 집행일자를 모레로 하면 어떤가?

머시기: (귀찮아하며) 변함없다. 그래도 행복하다.

집행관: 어제였으면 어땠을까?

머시기: (핏대를 올리며) 이자식아! 말장난  그만해라! 너 같은 무식쟁이에게 자세히 일러 줄 수는 없겠지만, 아마 어제 갔어도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집행관: (뻘쭘하여) 혹시, 두려운가?

머시기: 전혀 그럴 리 없다. 평생을 그렇게 살지 않았다.

집행관: 어떻게 살았는데?

머시기: 끝내주게 살았다...

집행관: 그게 무슨 뜻인가? 구체적으로...

머시기: 이런 니기미... 씹체적으로 얘길 하마! 오늘에 살았고, 오늘 행복했으며, 내일 따위는 안중에 없었지만, 빌어먹을 소급된 어제가  오늘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해가 ? 안되었어도 그만 이지만...

집행관: (시큰둥히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머시기: 살았날들이 징하다고 한들 지금 행복과는 견줄 수 없으니 참 잘살아냈다.(잠시 침묵 후, 집행관을 다보며) 더 이상 할 말 없다.

집행관: (성질을 내며) 이 양반아! 그런 중언부언 말고, 사세구나 절명시최후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없느냐 이 말이야...!

머시기: (조롱하듯) 이런 미친놈아! 적어도 나는 천박한 노예 출신 히데요시가 아니다. 그러니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느니... 어쩌고 그런 모지리 잡것 같은 헛소리를 거부한다. (나지막한 소리로) 마지막 말을 원한다고? 나만큼 당신도 행복해 그거면 된다...

집행관: 내 직권으로 당신에게 오늘 자살할 기회를 준다면?

머시기: 더 이상 귀찮게 하면 죽기 전에 니 모가지를 콱! 물어 뜯어 버릴 거다! 이런 느자구 없는 시키 같으니라고!

집행관: (짐짓 당황해하며) 거... 가는 마당에 뭐 그리 심한 욕을 하는 거요?

머시기: (악을쓰며)시끄럽다! 네 할일이 있으면 속행하되, 순간의 행복을 밟지 말고 비켜라...


  고개를 떨군 머시기, 이때 첼레스타를 위한 3악장 아다지오가 시작된다. (음산한 배경음악이 점점 커지고)집행관이 어께에 맨 서양 낫을 바로잡아 치켜세울 무렵, 무대 조명 페이드아웃 되며 막이 내린다.


  부조리극의 대명사인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원작자인 사뮤엘 베켓이 그의 무덤에서 튀어나와 내게 경멸이 가득찬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지나 않을지 심히 우려가 된다.

  파릇한 청년시절, 산울림 소극장에서 이 부조리 극을 수차례 경험 했건만, 막이 내릴 때까지 오지 않았던 고도와 막이 내리고 나서도 도저히 알 수 없었 작자의 의도를 궁금해 하며, 나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치루고나면 일말의 복수란 영판 허망하고 찝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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