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고 난 후에 돌아가셨다. 결혼하기 전, 아버지와 33년 정도를 같이 살았는데도 추억이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좋은 추억을 쌓으려면 자식보다는 부모님이 더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어른이며 가정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근데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소비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독후감으로 상을 받았었다. 술 취해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상장을 자랑했다.
- 아버지. 저 독후감으로 상 받았어요.
- 어이구. 장하다.
아버지는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칭찬과 함께 만 원짜리 돈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아버지와 함께 공중목욕탕에서 목욕했다.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적은 기억의 파편들이 아버지와 관련된 나의 추억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으셨던 것 같다. ‘자식 낳으면 알아서 자란다.’라는 말을 믿었던 것일까? 게다가 난 삼 형제 중에 막내인지라, 더욱더 아버지의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나와 놀아주지도 않았다. 사춘기 시절엔, ‘자식계획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실수로 태어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도 이제 자식이 있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래서 부모의 관점에서 아버지는 왜 그러셨을까? 하며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셨는데, 두 분 다 노동자다. 공장이나 항만 등 남 밑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았다. 아버지 시대인 80, 90년대는 노동시간이 길고 노동강도가 셌다.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몸은 이미 녹초다. 당연히 자식들 돌 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힘만 쓰는 단순노무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트레스도 발생한다. 아버지는 그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해소하시려는 듯했다. 그러니 자식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더 없는 것이다. 일요일, 명절 등의 빨간 날에는 집에서 쉬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꽤 오래 쉬는 명절날조차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다. 아무리 작업으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더라도 빨간 날에 조금은 같이 놀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버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아서 크겠지’라며 어린 자식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시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딱 두 번 울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었다. 두 번째는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을 보고 울었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채, 초점 없는 눈동자와 무표정이었다. 힘들게 펄떡이는 가슴만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예전에 무엇인가 헐떡이며 숨 쉬는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학창 시절 우리 집은 도로가에 위치한 2층 짜리 주택이었다. 나는 주말에 TV를 보며 쉬고 있었는데 “깨깽”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니 큰 개가 로드킬을 당한 것이 보였다. 무표정으로 누운 채 거동도 없고, 가슴팍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도로가에 차는 계속 달렸다. 2차 피해를 입을 것 같다. 위험에 처해있는 큰 개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119에 전화를 해야 하는지 112에 전화를 해야 하는지 헷갈려하고 있을 무렵, 이웃 아저씨가 큰 종이박스를 들고 와 다친 개 앞에 놓았다. 그러자 도로를 지나던 차들은 그 큰 박스를 보고 다친 개를 피해 지나갔다. 그리고 119 대원들이 개를 구출했다. 가슴만 움직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로드킬 당한 큰 개가 겹쳐 보였다. 큰 개를 도울 수 없었던 어릴 적 나처럼 그때도 아버지를 도와 드릴 수 없어서인지 눈물이 났다.
아버지 장례식날. 직장동료와 친구, 친척들이 조문 왔다. 형과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형도 나처럼 아버지와 같이한 추억이 없었는가 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아마 모진 놈들이라 생각하겠지.
아들이 태어났다. 산부인과에서 탯줄을 자르기 위해 손을 깨끗이 씻었다. 탯줄을 자르고 생일 축하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주었다. 반갑고 너무 보고 싶었다. 아들을 보는데 유럽의 교회 벽화가 생각났다. TV에서도 봤는데 천사가 날개 달린 아기들로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 왜 천사를 아기로 그렸는지, 아들을 보는 순간 공감이 되었다. 티 없이 순수한 것이 천사가 맞는 것 같다.
아내는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몸을 풀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아내가 아들을 내게 건넸다. 목을 받치고 조심해서 안으라는 말과 함께. 조심해서 안은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막 태어난 아들하고 공감대가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아내는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했다.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인사를 건네든가 안부를 물어보든지 하라고 했다.
- 잠은 잘 잤니? 불편한 데는 없니? 엄마 배 속에 있다 나오니 기분이 어때?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아들의 웃는 모습에 나도 즐겁다. 아내와 결혼해 아들이 태어나니, 앞으로 더욱더 잘 살아야 할 목표가 뚜렷해진 것 같다. 20대의 나는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질 않아 좌절하고 스스로 자책했다. 우리 아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아들의 정신교육은 내가 시키고 싶다고, 그 외 수학, 영어, 국어 등의 공부와 관련된 경우는 아내에게 맡기기로 했다. 내 삶을 바탕으로 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나의 이야기가 타산지석이 되어 힘든 삶 속에서 좌절하고 자책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어린이집에 잘 다니다가 갑자기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했다. 덜컹 겁이 났다. 뉴스에서 봤던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에 일어난 학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나도 어릴 적 겪었다. 내가 유치원생일 때 이유 없이 선생님이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친구들과 슈퍼마켓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여사장이 “여기는 놀이터가 아니다.”라며 발로 엉덩이를 세게 걷어차였던 일도 떠올랐다. 80년대인지라 의식 수준이 낮아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도 이런 일이 우리 아들에게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니 머리가 쭈뼛선다.
상황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는 어린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다. 아내와 나는 어린이집을 찾아갔다. 나는 어린이집 원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CCTV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양해를 구하며,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리해도 원장은 완강히 거부했다. 여러 번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내와 나는 좀 더 지켜보고 다시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내가 어린이집 원장에게 CCTV시청을 요구한 것이 화근이 되었나 보다. 어린이집에서는 우리 아들에게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이 운다거나 잠을 자지 않으면 무조건 “집으로 데려가라”는 것이다. 우리 아들에게 무관심 무대응으로 대했다.
아내에게 들으니, 어린이집은 어린이 한 명당 계산해서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다고 한다. 내 눈에 그들은 지원금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보였다. 우리 부부는 씁쓸해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된 것 같다. 우리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 학대받지는 않을까? 라며 의심하는 것보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어린이집이, 부모입장에서는 속 편하다. 자식이 생기니 좋으면서도 걱정거리가 늘어난 기분이다.
아들이 더 커서 유치원생으로 있을 때, 코로나가 한창 유행했다. 코로나는 뉴스로만 접했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내가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아내는 만나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말이다. 최근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알게 된 유치원 친구 엄마와의 식사가 발단이 되었다. 아내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고 격리에 들어갔다.
30평 아파트에서 격리공간이라 해봤자 방 하나에 머물 수 있지만 화장실, 거실을 같이 쓰기에 “격리”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가족 중 한 명이 걸리면 다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아내가 코로나 양성반응이 확인되고, 일주일 후에 나와 아들도 코로나 반응이 보였다. 아들과 나는 코로나 자가키트로 검사했는데 확연한 2줄이 나왔다. 양성이다. 회사에 보고하니 출근하지 말고 빨리 대형병원으로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대형병원에서 양성판정이 확인되어야만 일주일간의 자가격리 기간이 유급으로 처리될 수 있다고 했다. 아들도 마찬가지다. 병원에서 검사받은 서류를 유치원에 제출해야 하고 일주일이 지나야 등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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