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들
성규와 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성규의 절친인 “만홍이”라는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우리는 주말에도 만나서 놀았다. 같이 영화를 보기도 하고 PC방 가서 게임도 했다. 그때 처음 “스*크래프트”라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알게 되었다. 벌레 같은 징그러운 종족과 신비한 외계종족, 우리 인간종족이 싸우는 게임이다. 성규한테 이 게임을 배웠는데, 기초만 알려주었지 깊게 알려주지 않았다. 1대 1에서 지지 않으려 실력차이를 벌려두려는 것이다. 그래서 성규와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면 항상 졌다. 만홍이는 게임채널에 프로게이머들이 하는 것을 자주 시청할 것을 권장했다. 그리해도 성규를 이기진 못했다.
성규를 따라다니며 당구도 배웠다. 내 적성에 당구는 안 맞았다. 재미가 없었으나 성규와 어울려 노는 것이 재미있어서 당구도 자주 치러 갔다.
성규와 만홍, 나는 학교성적도 비슷했다. 우리는 고3 때 수능을 쳤는데, 수능점수 앞자리가 동일했다. 학업 수준이 비슷하니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정형편이나 환경도 비슷했다. 성규 아버지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시고 어머니는 가정주부. 만홍이는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 혼자 일을 하셨다.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부모님들이 다 육체적 노동을 하셨다. 환석이 부모님처럼 교수, 의사 등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환석이처럼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비슷한 것이 많으니 공감대가 많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이들이 내 절친, 인생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의 길이 갈라졌다. 나는 빠른 취업을 위해 2년제 전문대로 입학했고 만홍이와 성규는 지방에 있는 4년제 사립대학교로 입학했다. 그리해도 우리는 주말에 자주 만났다. 학교축제가 있을 때는 서로 초대해 같이 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성규와 만홍이를 통해 “태풍이와 진수”라는 친구도 알게 되었다. 둘 다 우리와 같은 고등학교 친구로 이과 출신이다. 태풍이과 진수는 지방 국립대에 다니는데, 고등학생시절 우리보다 공부를 더 잘했다.
우리는 이제 성인이기에 만나면 술집에 자주 모였다. 만나면 술 마시고 당구치고 PC방 가서 게임하는 것이 기본 일정이 되어버렸다.
만나는 친구들의 인원이 많아지니 그 사이에 균열도 조금 생겼다. 난 진수라는 친구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쉽게 이야기해서 잘난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수 아버지는 중심가에 커피숍을 하는데, 장사가 정말 잘 되었다. 진수가 자기네 가게로 우리를 초대해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진수는 항상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우리들을 불렀다. 자기가 사장인 양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이것저것들을 지시했다. 매니저라는 남자도 진수에게 존대를 했다.
- 매니저는 내 나이 몰라. 내가 일부러 안 가르쳐주었어. 물론 매니저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고.
- 네 얼굴 보면 존대할 수밖에 없어.
성규의 농담에 우리는 웃었다. 실제로 진수는 노안이었다. 20대 대학생인데 한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진수는 커피숍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등을 허물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손님이 많아 바쁠 때는 바닥에 떨어진 커피도 주워서 손님에게 건네준다고 했다. 위생적이지 않고 불량한 서비스를 자랑인 양 떠벌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 우리 가게가 위생적이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아도 상관없어. 주변에 커피숍이 없거든. 우리 가게에 올 수밖에 없어.
진수의 가게 주위로 경쟁사가 없기에, 자신감이 넘쳐났다.
우리는 진수네 커피숍에서 파르페 등을 먹고 한참 수다를 떨었다.
- 자. 우리 고기 구워 먹으면서 술 한잔 마시자. 오늘 내가 너희들을 초대했으니깐, 내가 한 턱 쏠게. 가자.
진수가 대장노릇을 많이 했다. 금수저인 진수가 돈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노릇을 하려는 모습이 나에게 좋게 다가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싫은 내색하지 않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진수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은 부모님께 받는 용돈으로 소비생활을 하기에 빠듯하기 때문이다.
진수는 대장역할을 하며 자주 큰 목소리를 냈다. 친구들이 1차로 술만 마시고 헤어지려고 해도, 진수가 PC방 가서 게임 몇 판 하고 헤어지자고 우겼다. 그럼 진수의 말을 따랐다. 주말에 여행을 준비하거나 목적지를 정할 때도 진수의 입김이 컸다. 게다가 우리 중에 차를 가진 사람은 진수뿐이었다. 그러니 여행 갈 때 진수의 의견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1년을 보내고 다들 군대 갈 준비를 했다. 우리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다.
군입대 전 환석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부전화였다. 환석이는 현역판정을 받지 못해 공익으로 빠진다고 했다. 나에게 조심해서 군대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 후에도 환석이와 간혹 연락했다. 내가 훈련병일 때 환석이와 연락이 닿았다. 우리 부모님께 “내가 군대에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내가 훈련병일 때는 연락을 자주 할 수 없었다.) 환석이는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께 나의 안부를 대신 전해주었다. 그때 참 고마웠다.
환석이는 자신의 몸이 좋지 않아 현역판정을 받지 못한 것과 현역으로 군대를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현역은 아니지만 군 전투복은 가지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나는 전역할 즈음에 용산에 가서 전투복을 샀다. 병장계급 마크와 환석이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달아 환석이에게 선물했다. 나의 선물을 받고 환석이는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기뻐했다. 군전역 후 환석이와 나의 관계는 예전보다 더 서먹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탓인 것 같다. 나에게 환석이보다 재미난 친구들이 있었다. 성규 쪽 친구들에 집중했고 환석이와의 관계는 등한시했다. 환석이란 친구가 내게 없어도 무방할 것 같았다. 현석이와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군 전역 후에도 성규, 만홍, 태풍, 진수, 나. 5명의 친구관계는 유지되었고 여전히 진수는 대장역할을 자저 했다.
어느 날, 진수가 우리 친구들을 맥주집에 불러 모았다.
- 친구들아, 우리 동네 맥주집에서 한번 보자.
우리들은 아무 생각 없이 진수의 말대로 맥주집에 모였다. 모여서 떠들고 노는데, 진수가 보이질 않았다.
- 진수, 이 녀석 왜 안 보여?
- 그러게. 지가 나오라더니.
- 전화해 봐.
만홍이가 진수에게 전화를 하니, 돌아온 대답은 “근처”였다. 잠시 후 진수가 맥줏집 현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근데 혼자가 아니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 손을 잡고 들어왔다. 더운 여름철이라,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학생은 앳되어보였다. 진수의 입은 귀에 걸려있다. 이제 보니 본인의 여자친구를 자랑하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진수는 여자친구에게 우리들을 차례대로 소개해주었고, 우리에게 여자친구 이름을 알려주었다.
- 여긴 다래.
군복무 때나 전역 후에도 여자친구가 없었던 우리들은 이성 친구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니 진수의 여자친구인 다래를 통해 단체소개팅을 애타게 원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은 진수의 말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다래"라는 여성의 외형이 TV속 걸그룹과 흡사함으로, 다래친구들도 걸그룹 아이돌과 비슷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기대감이 커질수록 자연스럽게 진수가 하자는 대로, 그의 말을 따랐다. 장난인지는 몰라도, 진수는 단체소개팅이라는 것을 이용해 우리의 애를 태웠다.
- 지금 우리 다래 시험기간이야. 그러니깐 조그만 더 기다려.
진수는 여전히 대장노릇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 항상 진수의 목소리가 컸다. 진수가 대화의 주제를 정하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60%가 진수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나와 만홍이는 그저 호응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30%는 성규이고 10%는 나머지 친구들의 목소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개팅에 대한 기대감이 한풀 꺾였다. 이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수는 다래를 통한 소개팅을 자주 언급했다. 우리들은 다시 재촉하기 시작했다.
- 야. 시험 끝난 지 한참 되었잖아. 왜 소개팅 이야기가 없어?
- 시험 끝나면 끝이냐? 스펙 쌓아야지.
- 아무리 국립대라도 공부하고 스펙만 쌓냐? 여유시간도 있을 거 아니야?
그제야 진수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 친구들아. 사실 나 다래와 헤어졌어.
‘그럼, 그렇지’, 우리들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진수가 우리 친구들에게 다래와의 연애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친구들은 진수의 직설적인 화법과 연인관계에서도 대장노릇을 하려는 심보 때문에 헤어졌을 거라 추측했다.
이제 우리 친구들은 똑같이 여자 친구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중에 최초로 여자를 사귄 진수는 더욱 기고만장했다. 자주 여성을 언급하며 연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특히 진수는 만홍이에게 연애설교를 많이 했다.
- 마! 자고로 남자도 여자처럼 꾸며야 돼! 거리에 지나가는 여대생들 봐. 예쁘게 치장한 애들한테 눈길이 가잖아. 그리고 그런 애들은 십중팔구 다 남자친구가 있어. 왜? 이쁘니깐 남자들이 마구 대시하거든. 만홍이, 네가 왜 주변에 여자가 없는 줄 알아? 넌 꾸미는 게 없잖아. 마! 동성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좀 꾸며라. 봐! 다들 말끔하게 입었잖아. 넌 너저분한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왔잖아. 가서 전신거울 보고 와라.
진수는 만홍이에게 이런 잔소리를 자주 했다. 그럼 성규는 먹잇감을 찾은 하이에나처럼 거들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들도 재미있어했다. 그럼 성규는 더욱더 신이 나, 만홍이의 넓은 이마를 “찰싹”때리곤 했다.
만홍이는 머리카락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머리가 풍성했는데, 군 전역 후 앞머리가 많이 빠져버렸다. 모든 머리카락을 묶어 뒤로 넘긴다면 황비홍이 절로 연상될 것이다.
만홍이 말로는 군대에서 자신의 탈모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근무하던 중대에 본인을 무시하는 후임이 있었다고 했다. 만홍이는 간혹 말을 더듬었는데, 그 후임이 그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창피를 준 모양이다. 만홍이는 그 후임을 언급하며 “그 새끼 때문에 내 앞머리가 다 빠졌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성규와 진수의 계속되는 놀림에 만홍이도 가만있지 않았다.
- 성규는 잘 생겼으니깐 그렇다고 치자. 진수, 너는 나랑 별반차이 없잖아. 너도 노안이고 잘생긴 얼굴은 아니잖아.
그럴 때마다 기다렸다듯이 진수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 자동차 키를 보여주었다.
- 마! 난 성규처럼 인물이 안되지만 이렇게라도 나 자신을 치장하잖아. 그러니깐 여자가 붙잖아.
진수의 전 여자친구인 “다래” 이야기에 만홍이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