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오락거리
나는 진수의 거만한 첫인상과 그의 대장노릇 탓에 불편했다. 하지만 군대도 다녀오고 여러 해가 지나자 좋지 않았던 마음도 사라졌다. ‘단지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각자의 개성이 있기에, 진수는 저런 사람인가 보다.’라며 진수를 친구로 인정했다.
군 제대 후 우리 모임에 한 친구가 합류했다. “동건”이라는 친구다. 이 친구는 우리와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다. 하지만 성규와 꽤 친한 모양이다. 성규가 우리 모임에 있을 때면 이 친구를 데려왔고 자연스럽게 우리 모임에 합류되었다. 이제는 6명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난 전문대를 졸업하고 취직했다. 중소기업이었다. 좀 더 나은 임금과 복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구인을 하는 곳은 대기업에서 물량을 받아 일하는 외주업체 또는 협력업체가 대부분이었다. 내 스펙에 이런 곳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의 능력과 수준을 고려하더라도 짜증이 났다. 정규직과 차별, 낮은 복지와 임금, 사장의 지인이나 친척과 다른 대우가 나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했다. 이직을 해도 거기서 거기, 다 비슷했다. 그래도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일하다 박탈감이 느껴지면 이직했다. 사실 내가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집에 얹혀 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모님과 같이 살기에 식비, 거주비 등을 줄일 수 있었다.
직장의 힘든 생활에 있어 친한 친구들과의 만남은 스트레스의 치유이다. 친한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쓰잘머리 없는 이야기도 하며 놀면서 힘듦을 잊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은 아직도 대학생이다. 나도 돈을 버니 친구들을 사주기도 했다. 그때는 어리고 친하다고 생각했기에, 심한 장난을 쳐도 이해해 줄 것이라 여겼다. 진수가 없을 때, 내가 대장노릇 흉내를 내기도 했다. 날씨가 쌀쌀한 가을이 되었다. 친구들이 맥주집에 가기를 원했다. 난 장난을 쳤다.
- 야. 너희들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남의 돈 벌려면 대가리 숙이고 체면 죽여야 돼. 내가 지금 그렇게 돈을 벌어.
- 너 생산직이잖아. 영업직도 아닌데, 체면 차릴 일이 있냐?
- 야. 그래도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아. 사장 앞에서는 내 일인 양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돼. 생산직은 관리직, 사장, 소장한테 고개 숙여야 된다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버는데, 이렇게 쉽게 맥줏집 가는 게 말이 돼? 헝그리 정신도 키울 겸 편의점에서 소주하고 과자부스러기 사서 난장 까자. 돈 아끼자.
돈 없는 대학생들 앞에서 난 허세를 부렸다. 태풍이가 다니는 국립대 앞, 잔디밭에서 신문지 깔고 앉아서 술 마실 것을 주장했다. 친구들의 인상이 망가졌다. 그럼 난 못 이긴 척 친구들의 말대로 했다.
- 그래. 맥주 집 가자.
나는 맥주집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장난을 2, 3번 쳤다. 실제로 태풍이가 다니는 국립대 내 잔디밭에서 신문지 깔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런 소소한 장난을 치며 돈으로 대장노릇을 하니. 진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친구들과의 모임에 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친구들과 만날 때 나나 동건이, 태풍이는 간혹 빠진 적이 있지만 성규, 진수, 만홍이는 늦게 오더라도 빠진 적이 없었다. 어떤 날은 나를 부르지 않고 모임을 한 적도 있었다. 모임을 할 때 사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성규이므로 나는 성규에게 버럭 화를 내었다.
- 야! 너 저번 모임에 왜 나 안 불렀어? 지들끼리 놀고. 왜 나만 왕따 시키냐고?
쌍욕을 섞어가며 심하게 따졌다. 전화 상으로 당황해하는 성규의 모습이 느껴졌다.
- 아. 알았어. 실수했네.
전화를 끊고 나니, 내가 너무 심하게 뭐라고 한 것 같다. 절친, 인생친구라고 믿었는데 나만 그리 생각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도 살며시 들었다.
침착하게 시간을 두고 머릿속을 정리하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은 다 대학생이다. 그들은 대학생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나는 직장인이므로 생각과 환경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놀이문화도 한몫하는 것 같다. 성규와 나머지 친구들은 4년제 대학생이라 직장인보다 여가활동이 더 많다. 그래서 당구, 스크린 골프, 스*크래프트 게임 등을 자주 해, 실력이 엄청 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친구들의 게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실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이다. 당구나 스크린 골프 같은 경우는 거의 게임비 내기를 했다. 그들과 게임하면 내가 질 것이 뻔하다. 힘들게 돈 벌어서 친구들 게임비 내주는 것과 다름없다. 현장에서 힘들게 번 돈을 그렇게 쓸 순 없다. 결국 나는 친구들이 게임하는 것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당구나 스크린 골프를 치는 것을 구경하고 있으면 성규가 가끔 이런 말을 했다.
- 원래 게임이란 것이 지면서 배우는 거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실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버리면 재미도 못 느낄뿐더러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친구들이 몇 점 접어주고 해도 실력차이가 너무 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쩌다 팀플레이를 하면 나와 같이 팀이 된 친구에게 미안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대부분 내기 게임을 했는데, 그때마다 배운답시고 매일 게임비를 낸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의 관심사인 게임에서 나만 제외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친구들과 술 마시러 다닐 때가 가장 즐거운 순간이 되어버렸다.
일찍 사회로 나가, 취직해 일하는 나를 좀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나만 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오직 “재미”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기 당구나 스크린 골프, 온라인 게임에 방해가 되니 나를 간혹 부르지 않은 것이라 추측되었다.
의리 있는 친구
그리해도 모임이 즐겁다. 특히 성규와 진수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성규는 학창 시절때와 마찬가지로 인기 있는 TV프로그램의 연기자들을 따라 했다. 인기드라마의 주인공이나 조연을 따라 하며 콩트를 보여주었다. 그럼 옆에 있던 진수도 합류해 같이 콩트를 했다. 재미난 연극이나 개그무대를 보는 것 같다.
저번에 성규에게 화를 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를 대하는 것이 예전과 같았기에, 사과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이기에 충분히 이해하며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모임이 딱딱하거나 제한적이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동창이나 친구들을 부른 적도 여러 번 있었고, 괜찮은 친구라며 성규가 낯선 친구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상철”이란 친구처럼 연말에만 보이는 친구도 있었다.
연말이면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새해를 보내기 전 술 한잔 마시며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성규가 상철이를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부르지 않고, 연말이나 간헐적으로 불러도 하철이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하철이는 허리가 불편해 중소기업에서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연봉이 2천만 원이라고 했다.(2010년 기준) 어찌 되었든 나는 정해진 인원이 없는 우리 모임이 우리 친구들의 문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성규, 만홍, 진수는 빠진 적이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한 번은 성규가 이과 친구라며 “현수”라는 친구를 불렀다. 우리는 술 한잔 거하게 마시고 PC방으로 갔다. 스*크래프트 게임을 했는데, 친구끼리 편을 먹고 인터넷상 모르는 상대팀과 대전을 펼쳤다. 그러던 중 다들 게임을 끝내고 손을 털었다. 게임에 몰두하던 현수는 혼자 남아 계속 게임을 진행했다. 현수를 제외한 우리는 계산을 하고, PC방 밖을 나가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현수가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현수에게 태풍이가 제일 만만해 보였나 보다.
- 야이 씨발놈아. 나 혼자 두고 먼저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야지.
쌍욕에 태풍이가 단단히 화가 났다. 얼굴이 붉어지더니 달려들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싸움을 말렸다. 나는 현수가 차분해진 것을 확인하고 가서 이해시켜 주었다.
- 야. 이게 우리 친구들의 문화야. 우린 원래 이래. 네가 눈치껏 상황보고 다들 일어나면 일어났어야지. 너 하나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기다릴 순 없잖아.
- 그럼 말이라도 해야지.
- “누가 말했겠지”하며 다들 미루다 보니 이리된 것이지. 네가 이해해.
내가 이해시켜 주었는데도 현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 이후부터 성규는 더 이상 현수를 부르지 않았다.
우리 모임에 갑자기 진수가 보이질 않았다. 식당이나 술자리에서 진수가 항상 큰소리로 대화하기에, 우리는 목소리 톤을 낮출 것을 강요했다. 근데 모임이 조용하니 진수가 자리에 없는 것이다. 나는 성규에게 물었다.
- 진수, 안 보이네. 어디 갔어?
- 일본 유학 갔어.
- 어이구. 일본유학 쉽게 가네. 난 아직 해외도 못 갔는데.
- 진수 집에 돈 많잖아. 금수저니깐 가능한 것이지. 예전에 데려온 여자친구 봤지? 다래. 어떤 여자가 진수랑 애인 하겠냐? 진수가 차 있고 돈 잘 쓰니깐 붙어있었던 것이지. 계속 붙어있으려고 했는데, 성질이 하도 지랄 같으니깐 헤어진 것이고.
- 일본에 얼마간 있는 거야?
- 한 1년 정도 있을 거라는데, 대학교 교환학생자격으로 가는 거래.
진수가 없어도 모임이 허전하다거나 공백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성규가 워낙 재미있는 친구라, 성규위주로 모임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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