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예순을 조금 넘기셨을 무렵부터 초저녁 잠이 많아지셨다. 아무 때나 잠들고, 아무 때나 일어나 거실과 방을 오가며 서성이셨다. 화단에 물을 주기도 하고, TV를 켜둔 채 소파에 누워 이내 다시 잠들곤 하셨다. 엄마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다니셨다고 했지만, 함께 사는 가족들에겐 곤욕이었다. 어쩌면 그 살금대는 발걸음이 더 거슬렸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TV 음량이 점점 커졌다. 거실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이었다. 엄마는 TV를 틀어둔 채 잠드는 날이 많았고, TV는 엄마에게 자장가가 되었다.
“엄마는 저 소리를 듣고도 잠이 와요?”
“TV가 자장가야. 눈이 시큰거려서 그런지 잠이 온다.”
어쩌다 전화 통화를 하려 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엄마, TV 소리 좀 줄여봐요. 엄마 목소리가 잘 안 들려요.”
그러면 엄마는 금세 미안해하시며 리모컨을 찾으셨다.
나는 엄마의 나이 듦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새벽마다 집안을 헤집는 엄마가 불편했고, 대화를 하려면 목소리를 한껏 높여야 했다. 전화를 끊고 나면 목이 따끔거려 연신 물을 마시곤 했다. 나에게 엄마의 노화는 마치 강 건너 불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저 불편한 일들이 하나씩 늘어간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마흔을 넘기며 잦은 수술로 월경이 멎었다. 남들보다 십 년은 이르게 찾아온 갱년기가 버거웠다. 몸의 불편이 내게 닿자 그제야 엄마가 보였다.
‘엄마도 이런 시간을 지나왔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를 향한 연민이 조금씩 깊어졌다. 퉁명스러웠던 말투가 다정해졌고, 하루에 한 번은 꼭 안부를 물었다. 누군가를 살뜰히 챙기는 일이 때로는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엄마가 아직 내 곁에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걸.
그날 이후로 번거로움은 사라지고, 고마움이 자리를 대신했다.
엄마와의 통화는 길지 않다. 거의 매일 전화하다 보니 대화는 단출하다.
“엄마, 안녕? 안부 전화예요.”
“응, 안녕~”
“식사하셨어요?”
“그럼, 했지.”
“필요한 건 없고요?”
“없어~”
“날이 차가워졌네요. 따뜻하게 입고 나가세요.”
“그래, 그래야지.”
“또 전화할게요. 안녕~”
“너도 안녕~”
길어야 3분 남짓. 그래도 엄마는 내가 매일 전화해 주는 게 참 좋은가 보다.
매일 반복되어도 매일 반가운 게 자식이고,
그 반복을 기다리는 게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
쉰이 넘어서야 겨우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