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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네, 지가을입니다.

by 뇌팔이

알람소리가 요란한 아침, 분명히 늦었는데 그닥 위기감도 없다.

반평짜리 화장실 찾아가는데 굳이 눈뜨고 정신차릴 필요있나. 그냥 기어간다. 어짜피 안경없으면 눈뜬 장님이라 큰 차이도 없으니까. 라식인지 라색인지 스마일인지 하는 건 벌써 3년 전부터 꿈만 꾼다. 이놈에 것만 끝나면, 바쁜 거 급한 거 요것만 끝나면 해야지 마음먹었는데 왜 이 바쁨은 지나가지를 않는거냐.. 이제는 굳이 해야되나 싶다.


화장을.. 할까.. 해야될까.. 새벽에 들어와서 두시간쯤 잤나.. 뭐, 그거치고는 얼굴이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가끔 일이 재밌기는 하다. 다만 내가 다 하고 싶지는 않을 뿐. 대기업처럼 분업 확실하고 능력있는 동료들이랑 일하면 좀 좋아... 학교 다닐 때 지금처럼 공부했으면 지금 이 꼴 안 볼텐데. 사장은 사장이라 갑질이고, 신입은 신입이라 갑질이고, 갑은 타고난 듯이 갑질 해대는데 이 속을 누가 알아.


대충 덜 편해 보이는 복장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서본다. 오늘도 퇴근은 글렀고 지각이라도 제대로 하자. 양치하는 사이에 벌써 전화가 두통이나 왔다. 바로 받지 않으면 문자가 온다. 뭘 또 당장 보내달란다. 007 제임스 스본드 오빠도 미션 하나 끝나면 전화기 던지고 휴가 가던데 어제 분명히 마무리 지은 일이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빛의 속도로 초기화 시키는 그들의 능력이 이젠 놀랍지도 않다. 예예, 오늘은 택시를 타고 출근해야겠다. 한시가 바쁘다고 숨이 넘어가시니 차 안에서라도 일을 끝내서 보내드려야죠. 물론 택시비는 한 번에 일을 못 끝낸 무능한 내가 부담한다.


직장생활 10년차, 서른 여섯, 여전히 싱글이고, 아직도 과장이고, 후임은 2년째 구하는 중인데, 그동안 휴가는 당연히 밀렸고, 출근 안 하는 주말엔 잠자거나 병원신세고, 친구들이랑 제대로 만난지 반년은 된 것 같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당장 그만두라고 성화지만 여자 나이 서른여섯이면 이직도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나마 지금 다니는 곳이 익숙해져서 편하고, 최소한 사무실에서 누구 눈치볼 일은 없으니까. 오늘도 버틴다. 곡괭님은 아무래도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나보다. 결국 다시 시전화벨이 울렸다.

"네, 지가을과장입니다."


매일 한결같이 바쁘고 피곤한 을의 일상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가지, 당근, 양파, 양배추.. 달큰하고 친근한 농작물이 함께 모여 일하는 중소기업과 곡괭이, 호미, 낫, 삽 등 농기구가 이끄는 외국계 기업간의 협업관계를 현실세계에서 언젠가 한번쯤 일어났던 사건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에피소드로 풀어나갈 생각입니다. 개인의 경험과 감상이 무던히도 묻어날텐데 간혹 불편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구석이 있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안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젊어서 용감했고 어리석었고 아름다웠던 저의 오래된 기억들에서 누군가는 위로를, 누군가는 희망을 찾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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