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게 열한시, 퍼석한 텃밭에 둘러앉아 주간회의를 시작한다. 어제 늦게까지 야근한 지과장도 어지러운 책상을 대충 미뤄두고 회의테이블에 앉았다. 사람좋은 양부장은 또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면서 심드렁한 직원들의 기분을 엿본다.
"홍대리 원래 안경썼었나? 허허. 안경쓰니까 어째 훨씬 어려보여. 허허"
오늘도 제일 만만한 홍대리가 타겟이다. 무슨 말만하면 얼굴부터 빨개지는 고질병 탓에 말도 꺼내기 전에 기가 죽는 홍광무대리. 덕분에 입사 3년차가 되도록 속을 알 수가 없다. 도통 말이 없으니.
"요즘 계속 야근해서 렌즈때문에 결막염왔대요. 그러길래 애를 작작 굴려야지 사람 꼴이 이게 뭐에요."
하늘과장이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나란히 앉아서 그런가 그래도 둘은 대화를 하는 모양이다. 서른 후반으로 까칠하기 이를 데없는 마하늘 과장은 홍대리보다 늦게 경력직으로 입사해 이제 2년차에 갓 접어들었다. 좋게 말하면 성격이 칼같고 워라벨에 진심이지만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는 대하기 어렵고 무책임한 인상이 짙다.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타입이랄까.
"도대체 사람 언제 뽑아요. 이대로 일이 하루하루 굴러가는 게 불안하지 않으세요?"
마과장 말도 틀린 게 없지만 대답없이 어색하게 얼버무리는 양부장 속도 이해는 간다. 창사 이래 내려간 적이 없는 채용공고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작은 회사에서 일해 보겠다는 젊은 친구도 흔치 않고 어쩌다 서류가 들어와 면접을 볼라치면 당일 노쇼가 90%다. 귀하디 귀한 신입 모셔서 입사확정을 지어도 출근 당일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출근 당일 9시에 문을 열고 들어와야 진짜 현실신입이 생기는 거다. 물론 그 후로 몇달이나 버틸지도 의문이지만.
"회의 시작해요."
의미없는 대화를 마무리 짓는 것은 언제나 지과장 몫이다. 일을 해결하는 사람은 없고 방관하거나 불평이나 늘어놓는 이들 뿐이니. 당장 오늘 해야할 일이 산더미구만 누구 하나 도와줄 마음은 없으면서 그저 눈치보고 남탓하는 꼴들이 진절머리 난다.
"오늘 곡괭이랑 미팅있는 날인데 누가 같이 가요?"
중년층 클라이언트들은 대게 그렇다. 미팅을 잡는다. 요즘 젊은 애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지만 적어도 커뮤니케이션은 그쪽이 더 나은 것 같다. 메일이나 문자 등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해서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는 괜한 시간 낭비가 적다. 그런데 과장, 부장쯤 되는 중장년층은 무조건 미팅이다. 심지어 요즘 버추얼 미팅 툴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굳이 자기 사무실까지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대면 미팅의 장점도 충분히 많다... 알지, 알지만! 우리 모두 바쁘잖아요...? 왕복 두시간 이상 시간을 버리면서 한시간짜리 미팅을 해야하는건지...
"내가 가지 뭐. 내 차타고 가자."
양부장이 선심쓰듯 대답한다. 잔뜩 긴장해서 눈알만 굴리던 홍대리는 한시름 놓은 표정이다. 어짜피 진행상황은 모두 지과장이 알고 있고, 앞으로도 지과장이 알아서 하겠지만 클라이언트 앞에서 이 일을 개인이 혼자 하고 있다고 밝힐 수는 없으니까 책임자든, 조력자든 한명은 따라가는 게 맞지.
'아아ㅏㅏㅏㅏㅏㅏ악!'
손바닥만한 회사에서 소리를 지를 수는 없다. 우리 회사 직원은 물론이고 옆 사무실까지 깜짝 놀래킬 계획이 아니라면. 네명이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열두평짜리 사무실에서 지과장은 오늘도 숨을 참는다.
4/5 22:55
보낸사람: 곽관희 과장
받는사람: 지가을 과장
참조: 양파랑 부장, 홍광무 대리, 마하늘 과장
제목: RE:RE:RE:EP forum] 부스운영안 #21-2수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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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유선상으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번 전시에서는 저희 부스를 액티비티 위주로 운영하려고 합니다.
현재 보내주신 운영안은 너무 학술정보에 치중해서 관람객을 인게이지 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다시 고민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정이 타이트 해서 당분간은 저희 부스 준비에 집중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일 오전에 팀회의가 있어서 가능하면 그때 수정된 내용 공유하려고 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수정안 주시면 내부 의견 취합해서 내일 오후에 잠깐 미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곽관희 배상
4/6 11:02
보낸사람: 곽관희 과장
받는사람: 지가을 과장
제목: RE:RE:RE:RE:RE:EP forum] 부스운영안 #21-2수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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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수정안 확인했는데 아무래도 모객을 신경쓰다 보니
키메시지전달이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팀내에서는 도슨트 형식으로 VIP고객대상으로 소규모 워크숍을 운영하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방문자 수도 중요하지만 전시 참관 후에 매출로 연결되는 방법을 생각해봐주세요.
내일 사장님 보고 들어가야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보고 못 할 것 같습니다...
이따 오후에 오시지요?
오실 때 기념품 샘플도 가지고 오시나요?
곽관희 배상
학회가 무슨 홈쇼핑도 아니고 부스 참관한다고 제품 살 것 같으면 전시박람회 스폰서쉽을 뭣하러 영업씩이나 하겠니. 한숨이 절로 난다. 장사의 신 백종원아저씨도 위아래로 훑어 볼 소리를 하고 있으니 속이 터져도 그냥 터지는 게 아니다. 밤새도록 운영안 수정해서 보내고 겨우 새벽에 쪽잠자고 나왔더니 아침 일찍도 아니고 오전 중턱이 지나는 시간에 한줄 한줄 정성스럽게 사람 약을 올린다.
"진도가 안 나가는 게 누구때문인데 지금... 아니 한달도 안 남았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으면 언제 시안따고 언제 제작하겠다는 소리야...ㅎ..."
넋두리가 절로 터져나왔다. 홍대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홍대리, 지난 주에 기념품 샘플 주문한 거 와있어?"
소심한 대신 눈치가 백단인 홍대리가 재깍 일어나서 기념품을 챙긴다. 지난 주에 구매한 기념품 샘플이 한두개는 아니지만 무던한 지과장이 얼굴을 붉히는 고객은 많지 않다. 그리고 샘플만 몇개째 사고 실주문을 하지 않은 고객도 별로 없다. 아직 수거해 가지 않은 반품 상자를 보면 쓸모없어진 수고로움들 같아서 속이 쓰리다. 트랜디한 제품을 찾아달라했다가, 호불호가 없는 제품을 찾아달라더니, 매일 쓰는 소모품이 좋겠단다. 하지만 내 돈 주고 살 것같지 않은 사치품이면 좋겠다고?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요구사항을 쏟아내는 모습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빠진다. 게다가 매번 새로운 요구사항이 추가될 때마다 지난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좌절감은 어느 한편으로는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대단한 일을 해내겠다는 큰 꿈은 없어도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출근해서 한다는 일이 인터넷 쇼핑몰 뒤지면서 만원짜리 기념품 찾는 일이라니. 심지어 진심으로 각잡고 야근하겠다고 저녁까지 챙겨 먹었는데 정작 인터넷창과 슬라이드를 동시에 펼쳐 놓고 샘플 이미지 캡쳐떠서 메뉴판 만들듯이 정성스럽게 사진 붙이고, 가격쓰고, 제품명에 특장점까지 진지하게 써넣고있다. 그렇게 사무실 문앞에 쌓여있는 샘플 박스들 위에 묵직하게 쌓여있는 그 애달픈 수고가 안쓰럽고 측은하다. 그나저나 수량을 맞추려면 아무리 늦어도 2-3주 전에는 발주해야할텐데 이번 주에도 확정을 못 받으면 큰일인데. 주섬주섬 샘플상자를 싸서 지과장에게 내밀었다.
4/6 13:34
보낸사람: 지가을 과장
받는사람: 마하늘 과장
참조: 양파랑 부장, 홍관무 대리
제목: FW:RE:RE:RE:RE:RE:EP forum] 부스운영안 #21-2수정안
첨부: EP forum_부스운영안 #21-4수정안.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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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장님,
오늘 오후 미팅에 가져갈 자료 수정사항이에요.
첨부 확인해주세요
감사해요
지가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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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과장님, 이거 몇개 안 되는데 빨리 해줄 수 있을까요? 저 네시에 나가야할 것 같거든요"
마과장은 어쩔 수 없이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왜 이런 의미없는 수정에 목을 메는지 모르겠다. 서로 말 통하는 성인끼리 수정방향을 정확히 잡고 모두가 합의점에 이르렀을 때 액션을 취하면 될 일인데 꼭 그려서 보여주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결과를 만들어 나간다. 비효율의 극치. 물론 혼자 전전긍긍 중간에서 고생하는 지과장 마음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 패턴에 끌려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미련하게 혼자 해결하려고 드니 저 고생이지. 점심도 못 먹은게 분명하다. 직접 클라이언트를 만날 일이 적은 디자이너는 늘 답답하다. 클라이언트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저렇게까지 극진일까. 틀린건 틀렸다고 말하고, 안되는 건 안된다고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삶에서 직업이 갖는 의미는 매우 제한적이다. 한 개인을 특정하는 사실들 중 하나일 뿐 삶을 정의하는 목표나 가치가 직업일 수는 없다. 마과장은 모두가 제도아래 굴욕적으로 살았다면 노예해방도 없었고 르네상스도 없었다고 믿는다.
"수정하는데 오래 걸리는 게 아니라, 이게 수정을 해주는 게 의미가 있냐는 거야. 저번에도 자연물이 좋다고 해서 넣었다가 다시 되돌렸잔아. 물방울은 어떻게 넣어도 어색한데 굳이 여기 그거를..."
물론 손은 움직이고 있지만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푸념을 멈출 수는 없었다. 벌써 한달 째 똑같은 그림을 몇장이나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 키비주얼 잡을 때도 그렇게 애를 먹이더니 시안을 확정해놓고 이제와서 온갖 디테일을 차례로 수정하며 엿을 먹이는 중이다. 이럴거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다. 그치만 질 수는 없지. 오기로 모든 수정 사항을 칼같이 적용해준다. 굵은 선으로 강조해 달라고 하면 굵은 선을 넣어주고, 컬러를 바꿔달라면 너댓가지 컬러로 펼쳐서 작업해준다. '자전거가 산악자전거였으면 좋겠다, 모델이 좀 더 나이들어 보였으면 좋겠다, 흰머리는 좀 지나친 것 같다,....' 모든 수정 사항이 하찮아서 다 기억하기도 버겁다. 그러다가 이런 저런 수정이 지칠때즘 되면 이제 폰트로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딱딱한 느낌이라는 둥, 너무 기본 폰트라는 둥. 이사람들아, 기본폰트를 안 쓰고 싶으면 유료 폰트를 사셔야 해요. 디자인비도 쪼들리는데 폰트 살 돈은 있으실랑가. 게다가 작업 시간은 어떻고? 디자인 기술은 둘째치고, 일하는 시간만 생각해도 편의점 알바가 시급을 더 받을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소요시간이 돈이라는 걸 생각 못하는지 모르겠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비참한 점은 사람들이 제작비가 비싸거나 재료비가 비싸다고 하면 이해하면서 디자인비가 높은 것은 못 받아들일 때다.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한낱 물건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책상 여섯개가 옹기 종기 붙은 사무실에는 불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다. 복합기 한대, 수납함 한개, 우산꽂이 한개, 행거 한개, 정수기, 냉장고. 그리고 네 사람이 씩씩 거리며 각자의 일에 집중한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끄는 소리, 한숨소리, 의자 끄는 소리, 정수기 소리, 낮은 기침소리,...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성긴 매듭처럼 이어진 이들은 함께 일하는 중이다. 각기 다른 데드라인에 쫒기면서 숨죽여 좌절하고 또 날을 세운다. 미팅 준비가 아직 덜 된 지과장은 점점 화가 난다. 준비없이 전혀 새로운 방향성이 던져졌는데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리 만무하건만 불가능은 불가능이고 현실은 현실인지라 뭐라도 끄적여서 가져가야할 판이다. 이미 수십번 고쳐쓴 운영안이 있는데도 오늘 또 백지를 펼쳐야 하는 마음을 누가 알까.
텃밭기획 입구 벽에서 숫자가 없는 벽시계는 무심하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