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출근해서 볼 수 있게만 해주세요."
곡괭님이 수화기 너머에서 세상너그러운 처사라는 듯이 덧붙였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고, 지난 주에도 그랬듯이. 두페이지짜리 브로슈어 작업을 두달째 이어가는 중이다. 이제는 제품 로고만 봐도 신물이 올라온다. 하늘과장한테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답답하다. 이럴때는 수화기를 뚫고 나오는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차라리 고맙다.
두달 전, 신상품을 준비 중이라며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전화가 왔다. 먼저 제품 브로슈어를 만들고, 대형 론칭이벤트도 준비중인데 다른 경쟁사들을 마다하고 텃밭기획과 함께 하게 되었다며 잠시 말을 쉬었다. 아마 고맙다거나 황송하다는 표현을 기다리는 모양이었지만 덤덤히 들숨날숨으로 응답하는 것으로 작은 반항심을 표현했다.
제품 론칭은 지지부진한 작업이다. 보통 1년전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는데 제품 방향성도 오락가락하고 제대로된 결정을 내리는 사람도 없는 경우가 많아서 준비하는 말단들만 죽어난다. 고급화 전략을 취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소수 특권층을 위한 제품처럼 브랜딩을 하자더니 갑자기 경쟁사 대비 가성비가 좋은 대중적 제품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다는 식이다. 그러면 옆에서 메시지가 바뀌었으니 카피를 새로 뽑으면서 이미지도 다시 고민해야할 것 같다고 덧붙이는 놈이 나타난다. 그럼 그놈이 이미지 컨펌을 맡게 되고 갑자기 결재라인이 한명 더 생긴다. 수백명이 일하는 대기업에서는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지과장 입장에서는 맡은 일에 너무 충실한 한명이 늘어날 때마다 업무시간이 제곱근으로 불어나는 꼴이다. 그런다고 견적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당연히 월급도 늘지 않는다.
"과장님, 커피 한잔 할까요?"
지과장이 통화내용을 정리하는 사이 하늘과장이 먼저 다가왔다.
"정리할 필요 없어. 자기들도 자기가 무슨말하는지 모를거야. 내가 다시 해볼께. 폰트 바꿔달라, 컬러 밝게 해달라, 제품 잘보이게 해달라, 피드백이 통일감이 없잖아. 제품 컬러가 밝은데 전체적으로 톤을 올리면 어떻게 제품이 잘 보이냐? 폰트를 뭘로 바꿔준들 찰떡이라고 하겠어. 그냥 다른 거 더 보고싶다는거야. 가자. 내가 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늘과장의 말이 구구절절 위로가 되는 말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으면서도 말대꾸 한번 못 하고 뜻도 없는 말을 받아적고 있었던 스스로가 가여워서였다. 그리고 오늘도 22시에 차단되는 메인 출입구 대신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쥐구멍 빠져나가듯 퇴근해야하는 게 서러워서였다.
"내일 출근 전에 보내라니 말이야, 방구야. 하루만에 뭐 뾰족한 게 나온다고."
말없이 앉아서 먼산만 바라보는 지과장 대신 하늘과장이 투덜거린다. 맞는 말이다. 그것말고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있는데 또 얼마나 쥐어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기업은 광고카피 한 줄도 수억씩 받는다던데 돈이라도 많이 받고 시달리면 현타가 덜 오려나. 쓴웃음이 나려는 찰나 단톡방 알림음이 울렸다.
"어우, 또 뭐래."
"오늘 저녁 메뉴는 닭볶음탕이래요."
이번 론칭을 준비하는 TF단톡방이다. 대기업들은 퇴근 후 메신저 연락 안한다더니 대행사 직원한테 보내는 건 예외인가보다. 팀리더가 언젠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시면 언제든 이 단톡방에 남겨주세요.' 라며 24시간 상시대기 모드를 설정한 이후로 정말 아무때나 시도때도 없이 급발진한다. 누군가 어이없는 아이디어를 올리면 방 안에 있는 열일곱명이 한마디씩 보태서 일거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개미굴이다.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 받을 때도 단톡방이라는 게 그 흐름을 놓지면 나중에 시간내서 다시 훑어봐야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확인할 수밖에 없다. 더 앉아 있어봐야 야휴식이 될 것 같지 않아 죄없는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빈컵을 들고 일어섰다.
"가요. 퇴근 전에 보내야죠."
“퇴근은 하는거고?”
오후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날아갔다. 햄버거를 씹는지 뱉는지 모르게 우적거리며 일했지만 언제나처럼 텅빈 사무실 문단속은 지과장몫이디. 불꺼진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홀까지 가는 길은 비상구 사인 덕분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복도 끝 창문에 천살먹은 거북이 좀비같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래도 아침엔 꺽어진 삼십대치고는 봐줄만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서둘러 외면하며 엘리베이터 홀로 돌아섰다.
"띵-!"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면서 저절로 로고개가 돌아갔다. 젠장. 건물 전체를 소등하면서 왜 엘리베이터 조명은 이렇게 밝게 켜두는지. 아닌가, 엘리베이터 전원을 끄지 않은 것에 고마워야 하는 건가. 조금 있으면 곡괭님 출근시간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잠이 싹 달아나는 것 같다.
데드라인과 갑의 출근시간 사이 어딘가에 아주 짧은, 을의 퇴근시간. 어둑한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기어나와 가로등 아래서 기다리는 택시에 탔다. 야간 택시기사님은 밤에 일하는 어드밴티지를 최대한 살려 노면의 요철을 하나 하나 느낄 수 있는 속도로 차를 몰았다. 하, 끝까지 다이나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