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미씨, 기획 신입사원이고 오늘부터 출근했어요. 인사들 나누고.."
언제나처럼 말끝을 흐리며 양부장이 신입 뒤로 숨었다. 통통하게 굽어진 등짝이 뒤뚱거리며 멀어졌다. 지과장은 어제 야근의 여파로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지만 최대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출근 첫날 어떤 일을 시킬 수 있는 걸까 고민하면서.
"기획팀 지가을 과장입니다. 반가워요. 일하다가 뭐 필요한 것 있으면 편하게 이야기 하세요."
"안녕하세요."
고개를 떨구며 꾸뻑 인사를 하는 자세에 뒷목이 서늘해졌지만 애써 떨쳐내며 하늘과장과 홍대리를 소개했다.
"... 홍광무입니다."
"우리는 작은 회사라서 서열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아요. 서로 도와주고 편하게 일하니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누가 홍당무 아니랄까봐 홍대리의 귀는 빨갛다 못해 점점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마과장이 보다 못해 한 마디 거들고는 거창한 신입 소개를 끝냈다.
"오늘은 어색할테니까 대충 분위기 파악하는 날이다 생각하고 지금 하는 프로젝트들 자료 훑어보면 어떨까요?"
구미씨는 말없이 고개를 꾸뻑 했는데 숨쉬듯 '네'라고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다.
"홍대리님이 구미씨한테 프로젝트 자료들 좀 공유해줄래요?"
지과장은 신입사원의 그런 태도가 점점 답답해져서 이 고구마 신입을 홍대리에게 맡겼다.
"엄마, 어딘데. 아니 좀 진정을 하고, 지금 어디냐구!"
하늘과장이 복도 끝 테라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통화 중이다. 층마다 복도 끝에 마련된 테라스는 복도와 분리된 유리문 때문에 목소리가 복도로 세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덕분에 냉난방이 되지 않는다. 경기도 외곽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하늘과장은 작년 연말에 출퇴근을 위한 중고차를 구매했다. 매일 왕복 4시간이 넘는 출퇴근 길에 시달리는 것도 문제지만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늦어도 8시반이 되기 전에 사무실에서 탈출해야한다. 자칫 잘못해서 9시 반에 동서울에서 출발하는 광역버스를 놓치면 무시무시한 택시비를 들여 집에 가거나 찜질방을 찾아 헤매야하기 때문이다. 독립해서 서울에 자리를 잡는게 꿈이었지만 몇년째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를 써도 제 한몸 누일 방한칸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대신 차를 선택했다. 그렇게 한달 쯤 자유를 만끽하는데 도저히 뒷통수가 따가워서 맘편히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아까 버스정거장 내려서 여기 언덕을 걸어올라오는데 무릎이 휘둘러 빠지는 줄 알았잖아. 아니 날은 또 얼마나 더워. 너 일찍 찍오면 차 얻어타고 올라고 전화했더니 전화 안 받더라?"
그 다음날 엄마명의로 중고차를 하나 더 샀다. 물론 할부금은 마과장 몫이다. 대신 퇴근할 때마다 엄마 외출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그것으로 위안삼기로 했는데 오늘 오후에 엄마가 길에서 사람을 치었단다.
"아니 그래서 보험사는 불렀어? 경찰은? 엠뷸런스도 왔고?"
엄마는 차 안에서 딸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한 모양이다. 답답한 노인네.
"아, 어디냐고!!!"
아무리 되물어도 애기를 치었다며 파란불이었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그만 전화를 끊었다.
"될대로 되라지."
사고를 냈으면 운전자가 상황을 책임져야지. 겉으로는 매정하게 내뱉었지만 마과장의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있었다. '만일 사람이 크게 다쳤으면 형사 사건이 될텐데 노인을 감옥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합의금을 어떻게 마련하지. 그 과정을 또 어떻게 견디지. 엄마가 보호자를 찾아갈 일은 절대 없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본 불구가 된 피해자 부모를 찾아가 무릎꿇고 비는 장면이 자신의 얼굴에 겹쳐 보이면서 눈앞이 깜깜해져왔다. 그러나 저러나 전화를 왜 안 받는거야. 아무리 재다이얼을 눌러도 전화연결이 되지 않았다.
"어머님이 많이 놀라신 것 같아서 대신 통화드렸어요. 어머님은 차에 앉아서 안정취하시라고 했구요. 경찰도 왔고 앰뷸런스도 오고 있답니다. 차에 치인 사람은 크게 안 다쳤어요. 어머님이 더 놀라신 것 같은데..."
잠시 후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마과장은 그제서야 겨우 사고 위치와 경위를 알게 되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래도 사람이 많이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침착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여오던 심장도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했다.
언제나 의존적이면서 어리광이 많은 마과장의 모친은 나이가 들면서 어리광이 아니라 불만이 많은 진상 아줌마가 되어갔다. 식당에 가면 반찬이 맛이 없다, 자리가 불편하다 불평하고 싸구려 옷가게에서는 사이즈가 작게 나왔다, 마감이 엉망이다 노골적으로 무안을 주는 통에 마과장은 그저 그녀의 동행이라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질 때가 많았다. (여담이지만 식당에서는 반찬만 두세번을 리필하고 옷가게에서는 옷을 20벌쯤 입어보고 겨우 옷을 하나 골라 사더라도 반드시 트집을 잡아 반품을 하러 간다.) 하물며 그런 외출에 반드시 딸을 대동하고 나가기를 고집하고 다녀올 때면 입버릇처럼 괜히 나갔다고 하는 통에 마과장은 매일 숨이 막혀왔다. 반드시 독립하고 말겠다는 다짐이 달리 어디서 생겼을까. 그렇지만 현실은 이렇다. 물리적 독립과 전혀 상관없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모두 마과장을 그녀의 모친 옆에 묶어둔다.
"저, 엄마가 교통사고를 낸 것 같아요. 가봐야할 것 같은데 어쩌지요.."
요즘 하루하루가 지뢰밭인 때라 텃밭기획 유일의 디자이너가 자리를 비우면 곤란한 일이 많을 줄 알지만 마과장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양부장은 당연한 듯 '어이쿠 많이 놀라셨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여줬다. 지과장도 측은한 눈빛을 보냈지만 자기 코가 석자라 심경이 복잡했을 것이다.
"구미씨, 출근 첫날에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제가 자리를 비우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요. 저 한 가지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마과장은 지난 주 곡괭님이 부탁한 수정에 대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니 비슷한 방식으로 스포츠 장비를 모티브로 촬영한 사진들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완성된 사진의 구도나 표현 방식을 참고하면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돌아와서 작업을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 보험사랑 통화했는데 별 일아니래. 곧 집에 갈 수 있다니까 집에 가 있어."
보험사 이야기로는 아주 경미한 사고였고 심지어 사고당사자는 아이가 아니라 덩치가 작은 할머니였다고 했다. 집 앞 큰길에서 코너를 돌자마자 길을 건너던 사람을 보지 못 하고 치었는데 운행 속도도 매우 낮았고 할머니도 평소에 지병을 앓던 분이라 놀라서 넘어진 것인지 실제로 차에 치어 넘어진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블랙박스를 봐야 알겠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독여 주며 전화를 끊었다.
마과장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사태가 진정된 상태라 집안이 조용했다.
"엄마, 나왔어."
모친은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대답이 없었다. 마과장은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합의금이 나갈지 보험금이 올라갈지 마음이 쪼글아드는 것 같은데 그저 어린 애처럼 이불을 목까지 덮어쓰고 큰 눈을 끔뻑거리며 누워있는 엄마를 보자 화부터 올라왔다.
"뭐 잘 했다고 엄살이야. 별일 아니래. 이제 일어나."
물을 한 잔 떠다 주니 너무 차가워서 못 먹겠다고 밀어낸다. 조금 데워서 가져다 주고 죽 한그릇 끓이려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서 못 먹겠다고 밀어냈다. 화가 치밀었지만 또 다시 심호흡을 한다.
"지이잉---"
아까부터 울어대던 휴대폰 진동이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고구미입니다.'
누가 신입사원 아니랄까봐 메일 제목하고는. 마과장은 혀를 차며 알림을 지웠다. 화를 달래며 흰죽을 끓이고 놀란 모친의 저녁상을 차렸다. 폭풍같은 하루는 마과장만 괴롭힌 게 아닌 모양인지 지과장에게서 긴 메시지가 왔다. 모친의 사고는 잘 수습이 되었는지 큰 일은 없는지 인사치레를 건니며 경황이 없을 줄 알지만 염치불구하고 오전에 이야기하던 건을 재촉할 수 밖에 없겠다며 난처함과 미안함이 묻어있는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한숨이 나왔지만 현실이 야속할 뿐 지과장을 원망할 마음은 안 들었다. 컴컴한 거실에서 노트북을 켰다. 어디 막둥이 찬스 한번 열어볼까.
4/9 16:30
보낸사람: 고구미 사원
받는사람: 마하늘 과장
참조:
제목: 과장님, 안녕하세요. 고구미입니다.
아까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또 필요하신 일은 언제든 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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