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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납골당까지

누구나 겪지만 쉽게 꺼내지 않는 기록

by 뇌팔이


장례는 어지러운 중간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계획하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았던 시간과 장소에 스스로의 의지와는 별개로 몸이 먼저 가 있고 순차적으로 던져지는 질질문에 답하다 보면 작은 항해를 한 것 처럼 언뜻 멀미를 겪으며 육지에 내린다.

부친은 육체도 정신도 강건한 편이었다. 몇년 전 폐섬유증(ILF)를 진단 받은 후에도 이전과 별 차이없는 일상을 일궜다.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했고 인간관계도 넓었다. 필자는 그의 성품을 닮지 못해 그런 행보가 늘 못 마땅했지만 모친에게도 정성을 다 했기 때문에 타고난 물성이려니 했다. 자식들에게 다정하고 손주들 손끝만 스쳐도 물고 빠는 팔불출 할아버지는 일흔 넘은 모친을 일곱살 난 소녀처럼 보듬고 사셨다. 찬물이 먹고프다면 얼음을 동동 띄워 주고 더운 물이 먹고프다면 컵을 데워서 뜨신물을 담아 주고는 행여 너무 뜨겁냐며 찬물을 들고 서 있는 남편이 어느 날부터 쇄한 것을 느낀 모친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언제부터인지 아버지의 방문이 뜸해졌다. 일주일에도 몇번씩 손주들 좋아하는 슈크림빵을 사들고 딸 집에 들러 한사코 말리는 화장실 청소를 고집스럽게 하던 아버지였는데 화장실에 붉은 곰팡이가 피도록 사는 것이 바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 아버지는 준비를 한 모양이다. 철없는 딸이 손주들과 추억 쌓자고 마라톤을 신청해놓으면 폐질환이 있는 고령환자가 겁도 없이 덥썩 같이 뛰어 주면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깔끔쟁이가 설거지를 미루는 날이 많았더란다.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쉬어가는 호흡이 짧아지면서 아무도 모르는 신호들이 지나갔다. 어느날 집앞에서 쓰러져 구급차가 온 날에야 희미한 적신호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하지만 전차는 멈추지 않았다. 성실하고 바지런한 부친은 누워있는 시간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하늘이 보낸 적신호를 거슬러 반드시 달려야 했다.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은 꼭 열흘 전이었다. 호흡이 어렵고 각혈을 보여서 산소치료를 시작했다. 각종 수액이 주렁주렁 달리고 코에는 산소호스, 복부에 소변줄까지 야무지게 차고 나니 아버지는 기가 빠졌다. 둘째날에는 직접 전화를 걸어 약속들을 취소하고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할만큼 호전 되는 듯 했다. 아이들 학교 핑계로 늙은 모친을 보호자로 앉혀두고 매일 오전 도시락을 싸다 날랐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부친을 보면서도 우리는 순진하게도 병원은 무슨 병이든 고치는 매직 월드인줄 알았다. 담당 교수가 가족들을 모아서 이제는 더 노력해볼 길이 없다고 말할 때도 아버지는 헐떡이는 숨 사이로 또렷하게 말 했다.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료진을 믿겠노라며. 그게 아버지가 지각을 가지고 나눈 마지막 데화였다.

중환자실은 고요했다. 조금은 어둑한 조명아래 집중치료 중인 환자들이 신생아실 아기들처럼 누워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약물에 절여져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머무른 얼굴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일곱살 아이가 되는 모친은 몇분 안 되는 면회시간마다 아버지 침상옆에 서서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주무르고 못 다한 말들을 했을 것이다. 동생과 제부도 허락된 시간마다 들어갔다.

나만, 아버지의 영혼이 더 이상 그 안에 없다고, 그 ‘가면’을 보지 않겠다고 돌아섰다. 무서웠던 것인지, 버팀목인 장녀로서 무너지지 않기 위함이었는지 아직도 분간이 어렵다. 그저, 문턱을 넘지 않는 것이 나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의료진은 하루를 못 넘기겠다 말했지만 아버지는 삼일을 버텼다.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다가 새벽에 달려가기를 두번 반복하고 나니 세번째 날에는 자동으로 그 시간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모친이 중환자실 침상들 사이에 서서 아버지 손을 잡고 두런두런 하는 사이 심장박동 수가 0이 되는 순간을 보았다고 한다. 연명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영화처럼 의료진이 달려오지도 않았고 주렁 주렁 달린 모니터에서 터질듯한 경고음도 울리지도 않았다. 사망선고는 중환자실 밖에서 마스크를 쓴 의료진에게 전달 받았다.


임종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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