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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서 영원한 우리

by 세비지

어제 친구가 "우리 캐리비안 베이 간 거 기억나지?"라고 물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순간 멈칫하며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그날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는 내가 당시 무슨 옷을 입었고 어떤 모자를 썼는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우리 파도풀에서 놀았잖아. 나 수영 못 해서 네가 가르쳐 줬잖아."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 한 장면을 꺼내어 보여주는 듯했다.


또 다른 친구가 "우리 서해안 간 거 기억나지?"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기억에는 없었지만, 친구는 마치 어제 일처럼 그 순간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내가 잊어버린 순간들이 다른 이의 기억 속에서는 선명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미묘한 감정으로 이끌었다. 마치 이미 지나간 과거의 편린일 뿐인(어쩌면 죽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내 존재의 일부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기억의 부재는 때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 잊어버린 시간들은 과거이기에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이 과거의 기억이 없다면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마치 퍼즐의 한 조각이 사라진 것처럼, 그 빈자리가 때로는 나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사실이 정말 존재하지 않았냐고 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그저 내 의식 속에서만 사라진 것일 뿐인거니까. 친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분명 그 순간을 살았고, 웃었으며, 감정을 공유했다. 그 순간의 나는 분명 실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영원을 꿈꾼다. 사라지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 그러나 물리적인 몸은 한계가 있다. 언젠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영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를 기억한다면,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존재한다. 나의 말, 나의 행동, 나와 함께한 순간들이 그 사람의 내면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나의 흔적이며 곧 나의 존재다.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한, 나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란, 이러한 기억들의 총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죽으면 나도 사라지는 것인가? 만약 내 기억을 간직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의 존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질문은 마치 불교의 윤회나 서양 철학의 영혼 불멸성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나는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답을 찾고 싶다.


기억들은 공유된다. 특히 강렬한 감정이 담긴 기억들은 더욱 선명하게 기억되는 만큼 구체적으로 전달된다. 한번은 지인에게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살짝 웃으며 말했지만, 방황하는 눈동자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들려주었다. 어떤 친구였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나는 만나본 적 없는 그 사람의 삶이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인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 글로 남기고 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기억을 통해 흘러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저장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관계다. 친구가 들려준 케리비안 베이에서의 하루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편린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드는 현재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영을 못했던 그 친구와 웃고 떠들며 추억을 공유한 기억이 지금 우리의 우정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축축한 날씨와 같이 추워하며 입술이 파래졌음에도 파도풀에서 물장구를 친 것, 함께 사우나를 한 것들은 내 기억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의 관계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영원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나눈 대화, 함께했던 순간, 주고받았던 감정들이 서로를 기억하게 하고, 그 기억들이 또 다른 이에게 전해질 때 우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는 이러한 기억의 연결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또는 내가 흙이 된다 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또 다른 이에게 나를 이야기해 준다면, 나는 더욱 오래 남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우리가 기억을 공유하는 한,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에서 계속해서 존재하고, 그렇게 영원을 살아가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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