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자격은 없다.
한달 전 쯤인가 동생이 나에게 물었다.
"언니 행복해지면 안되는 상황인데 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지고 그래요. 어떻게하죠?"
개인적으로 물음표를 띌 수 밖에 없는 질문이었고, 이렇게 답했다.
"행복해지면 안되는 상황이 어딨어, 그냥 행복해질 일이 더 많으면 좋은거 아닌가?"
이 말을 들은 동생은 화색을 띄우며
"언니는 제가 깊게 고민하는 일들은 아무렇지 않게 해결해줘요."라고 답했다.
우리는 왜 행복해지는 것을 불안해할까.
행복해지면 안되는 상황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그 감정을 느끼면 되는 것 아닐까.
느낀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감정과 상황, 행동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앞에 두고도 주춤한다.
행복해도 되는지 묻는다.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스스로를 향한 자기 검열의 흔적이다.
그녀의 감정의 안쪽을 구조적으로 들여다보면,
“나는 지금 무엇인가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를 아프게 했는데,
이런 내가 행복을 느껴도 되는 걸까?”
마치 '행복'이라는 콘서트에 초대받지 않았는데 무임입장한 느낌.
그 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자꾸 눈치를 보게 되는 상태다.
사회는 교묘한 방식으로 행복에 조건을 달아왔다. '성공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사회적 기준에 부합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이런 조건부 행복론은 행복이 우리의 기본적인 권리가 아니라 획득해야 할 특권이라는 착각을 심어준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행복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종종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된다. 주변의 누군가가 고통 받고 있을 때, 자신만 행복하다는 것이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데 나만 행복해도 되는 걸까?"라는 질문은 사실 공동체 의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문제, 시발점, 혹은 신호처럼 여긴다.
하지만 감정은 본질적으로 ‘결과’다.
어떤 상황에서든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반응.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이 없다.
이 감정은 보통 ‘맥락’ 위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말투, 눈빛, 상황 등이 감정의 배경이 된다.
우리는 그 맥락에서 슬픔을 느끼고, 분노하고,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감정을 단지 맥락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감정이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또 그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지속되는지는
우리 안에 내재된 ‘구조’, 즉 신념과 기준이 결정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내 몫을 다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한다.”
이러한 구조가 우리가 감정을 해석하는 무의식적 틀이 된다.
그리고 이 구조가 흔들릴 때, 감정도 함께 무너진다.
감정은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찾아온다.
하지만 그 감정을 허용할 수 있을지, 두려워할지, 억누를지는
우리가 어떤 구조 속에서 살아왔는지에 달려 있다.
이 구조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다.
“착해야 사랑받는다”, “성공해야 인정받는다” 같은 말들이 반복되면
감정은 자격과 연결되고,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문제는 이 구조들이 지금의 삶과는 더 이상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지만, 지금은 감정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이 이상하게 불편하고,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감정은 어떤 구조 위에 올라타 있는가?”
“그 구조는 지금의 내 삶에 여전히 유효한가?”
위의 한 예시를 보라. '나는 좋은 사람이어야한다.' 따위 말이다.
뜯어보면 얼마나 웃긴말인가.
좋은 사람의 기준은 무엇이냔 말이다
더해서, 우리는 누군가에겐 좋은 영향을, 누군가에겐 나쁜 영향을 동시에 끼치며 살아간다.
사람 사이의 작용은 애초에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렇게 과거에는 필요했던 생존 전략이, 성인이 된 지금에는 오히려 삶을 옥죄기도 한다.
만약 행복이 불편하다면, 그건 '행복하면 안 된다'는 오래된 메시지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기에 만약 감정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면 구조를 먼저 따져보자.
현재 구조가 지금 맥락과 맞는 구조를 가진 것인지 말이다.
내 말은 어쩌면 너무 가볍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행복해지면 안 되는 상황이 어딨어.”
하지만 그녀에게 그 말 한마디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얽혀 있던 실타래를 느슨하게 풀어줬다.
감정을 가질 자격을 시험대 위에서 인정받은게 아닌 존재자체를 허용받은 것이다.
허용은 단순한 인정을 넘어, 자기 존재 자체를 수용하게 만든다.
이번엔 내가 어쩌다 어떨결에 열어주었지만,
모든 인간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권리는 '나의' 감정이다.
존재를 허용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비로소 감정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결국 가장 중요한 허용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와야 한다.
"지금 이 감정을 느껴도 괜찮아."
그 한 문장이 자기 내면에서 시작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율성을 얻는다.
사회는 가끔 행복을 성취의 결과물로 프레임한다. 학업에서 성공하고, 좋은 직장을 갖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그 후에야 행복할 '자격'이 생긴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행복의 본질을 왜곡한다. 행복은 외부 조건의 결과가 아니라 내면의 상태이며, 그것을 경험할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들이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기본적인 안전과 생존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의 '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앞에서 사람이 죽고,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는 전쟁통에서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사랑한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충족되어야 할 조건'은 예상보다 낮은곳에서 존재할지도 모른다. 현실은 냉정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강인하고 유연하다.)
행복의 문턱을 낮추는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판단을 중단하는 것이다. 감정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 내면의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일 뿐이다. 행복이든 슬픔이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그저 정보다. 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으로 옮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인간은 행복만이 가치 있다고 믿지만, 사실 삶은 더 풍요롭다. 슬픔, 분노, 두려움, 불안... 이 모든 감정들은 우리의 삶에 깊이와 의미를 더한다. 진정한 정서적 건강은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감정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면의 풍경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동생에게 해준 단순한 대답은 어쩌면 그녀에게 이런 깨달음의 시작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느끼는 데 특별한 허가나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단지 수용과 허용의 문제라는 것.
p.s. 만약 누군가(본인 포함이다) "너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어?" 자격을 묻는다면 "어쩌라고?" 중지를 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