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폭증 이유
최근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혼율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불륜, 경제적 어려움, 육아 스트레스... 대부분 이런 것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이혼 사유 1위로 ‘가치관의 변화’를 꼽았다.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전환.
개인의 행복이 더욱 중요해졌고, 사람들은 이제 관계 안에서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가’를 민감하게 따진다.
관계가 정산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혼 전문 변호사가 말한 사례 중 충격적인 사례는 아래와 같다. 한 가정은 집안일에 대해 회사 '업무'처럼 분담을 하였다. 그렇게 집안일 배분 엑셀표가 만들어졌다. 마치 두 사람이 한 집에 살고 있는 룸메이트일 뿐인 것처럼.
또 하나의 사례는 공동비에서 아내가 생리대를 샀다는 것으로 불화가 일어났다. "너의 생리인데 왜 공동비로 생리대를 사냐"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더해 화장실 휴지를 누가 더 많이 쓰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던 가정도 있었다.
이 사례들은 단순히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관계조차 효율과 비용의 논리로 운영되는 시대를 보여준다.
우리는 점점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꾸기보다, 정산 가능한 관계, 공정하게 거래되는 동거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닌가?'라고 넌지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사랑은 계약이 아니다. 누가 어떤 역할을 맡고,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따지는 거래가 아니다. 사랑은 오히려, "이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때로는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손해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 된다. 그렇다. 사랑은 헌신이다. 그 헌신은 서로가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를들어 나는 귤을 좋아하지만, 상대방은 귤을 싫어한다고 가정하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상대방에게 계속 귤을 준다.
그게 내 마음이니까.
하지만 진짜 사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상대가 귤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는, 그 귤을 보며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해서 주는 거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귤이라는 매개체는 대화로 조율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귤'에만 집중한다. "내가 귤을 줬는데 왜 고마워하지 않지?" "나는 귤을 싫어하는데 왜 계속 주는 거지?"
사랑은 결국 귤을 주고받는 문제가 아니다.
서로의 언어를 번역해주려는 노력이며, 그 언어를 배우려는 자세다.
나는 100을 줬다고 느낄 수 있지만, 상대에겐 0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시작된다. 서로 다르기에 더욱 노력하여야 하며, 내가 100을 주어도 상대방에게는 0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그저 상대방에게 100에 더해 120, 150을 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나의 노력이 닿기 위하여 말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두 번째 산』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 번째 산: 개인주의 세계관. 자아의 욕구, 성취, 성공을 중심에 둔다.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산: 관계주의 세계관. 인간관계와 헌신, 소속, 책임을 중심에 둔다.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두 번째 산을 오른다는 건, 겨우겨우 오른 첫 번째 산을 다시 내려와 새로운 산을 오르겠다는 선택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짜 삶에 가까워지는 방향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우리 모두가 첫 번째 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손해 보고 있는가", "내가 이 관계에서 얼마나 더 받아야 하는가"를 계산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혼자 완성해가는 외로운 여정이 아니다. 함께 집을 지어가는 과정이다. 오로지 이기적인 관심사만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다. 그렇기에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나는 무엇을 더 받을 수 있을까'보다 '나는 이 관계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를 묻는 일이다.
관계는 끊임없는 계산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다. 투자라는 말조차도 다소 계산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여기서의 투자는 결과물이나 수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의 성장을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소비되는 관계'를 양산하고 있다. 즉각적인 만족, 가벼운 연결, 가성비 좋은 교류. 관계마저 소모품처럼 다뤄지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 오래 곁에 있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관계는, 시간이 지나도 그 흔적이 남는다. 오랫동안 곁에 있었고, 내가 어떤 순간에도 기대었던 그 사람은 삶의 '가치'로 남는다. 그런 관계는 기억 속에 오래 머물며, 그 자체로 우리의 내면을 지탱해준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과 연결된다. 팔로우, 좋아요, 메시지.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이상하게도 외롭다. 말은 오가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얕은 관계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말이 쉽고, 관심은 빠르게 소비되며, 관계는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유지된다. 그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새 깊은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깊은 관계는 시간이 들고, 감정노동이 필요하며, 오해와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풍요롭다.
누군가의 마음 안에 오래 기억되는 존재가 되려면, 나부터 그 사람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 나를 아무도 몰라주는 걸까?”라는 외로움의 바닥에는 종종 “나도 누군가를 깊이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이 숨어 있다.
현대사회에서 관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다. 모든 것이 계량화되고, 효율성이 최우선시되는 세상에서 관계마저 그런 논리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의 행복을 갉아먹을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계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연결에서 온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어떤 사회가 오로지 이기적인 관심사로만 지탱될 때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헌신이다.
그 헌신은 때로 불편하고, 오래 걸리며, 오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함께 넘은 사람은, 소비되지 않고 오래 남는다.
우리는 결국,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하지 않던가.